<봉지털기 238>
세계 경제가 겪어 온 일들은 우연히 일어난 것도 아니고, 저항할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의 결과도 아니다. 최고 경영진과 은행가들의 수입이 엄청나게 늘어나는 동안 평범한 미국인들의 임금은 정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노동 시간은 계속 늘어난 현상은 어떤 신성불가침한 시장의 법칙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우리가 갈수록 심해지는 국제 경쟁에 휘말려 일자리를 걱정하게 된 것이 끊임없는 교통 통신의 진보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30년 사이 금융 부문이 실물 경제와 점점 더 유리되고, 급기야는 오늘날의 경제적 재앙을 불러오게 된 것은 결코 불가피한 일이 아니었다. 열대 기후, 불리한 지리 조건, 경제 발전에 맞지 않는 문화 등 인간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구조적인 요인 때문에 가난한 나라들이 가난한 것이 아니다.
차차 설명하겠지만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 특히 규칙을 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에 따라 일어나는 일들의 방향과 결과도 결정이 된다. (P 17)
자유 시장은 정치적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정부의 정치적 개입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정부는 언제나 시장에 개입하고 있고, 자유 시장론자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이다. 객관적으로 규정된 자유 시장이 존재한다는 신화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첫 걸음이다. (P 20)
미국은 노예 매매의 자유를 둘러싸고 남북전쟁을 했다. (물론 남북전쟁의 발발에는 상품의 자유 무역, 즉 관세 문제에 대한 이견도 한몫을 했다.) 영국은 아편을 자유롭게 거래하기 위해 중국을 상대로 아편전쟁을 벌였다. 앞에서 언급한 아동 노동의 자유로운 거래에 대한 규제 또한 사회 개혁가들의 투쟁 덕에 가능했던 일이다. 공직과 투표권을 자유롭게 사고파는 행위를 불법화하려는 노력은 유권자를 매수하고 열성 당원들에게 공직을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운영되던 정당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이런 관행이 사라진 것은 개혁적 정치 운동, 선거 제도 개혁, 공직자 임용에 관한 규정 개선 등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시장의 경계가 모호하며 객관적으로 결정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경제학이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물론 자유 시장을 신봉하는 경제학자들은 우리가 시장의 올바른 경계를 과학적으로 확정할 수 있다고 믿기를 바라겠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P 30)
1980년대에 이르러 마침내 성배가 발견되었다. 바로 주주 가치 극대화 원칙이었다. 이것은 주주들에게 얼마나 큰 이익을 안겨 주느냐에 따라 전문 경영인들의 보수를 정해야 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주주들의 몫을 크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임금이나 투자, 재고, 중간 관리자 등의 비용을 무자비하게 삭감해 수익을 극대화해야 한다. 다음에 그 수익 중에서 최대한 많은 부분을 배당금 지급이나 자사주 매입 형태로 주주들에게 분배해야 한다. 경영자들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익과 주주들의 이익을 동일시하도록 경영자들의 보수 가운데 스톡옵션의 비중을 늘릴 필요가 있다. 이 아이디어는 주주들은 물론이고 대다수 전문 경영인들에게도 널리 지지를 받았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오랫동안 GE 회장을 맡았고, 1981년에 한 연설에서 주주 가치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고 알려진 잭 웰치였다. …중략…
전문 경영인들과 주주들 간에 결성된 이 ‘비신성 동맹’은 기업의 기타 이해 당사자들을 착취한 자금으로 유지되었다. (기타 이해 당사자들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강한 비영미계 선진국일수록 이 같은 비신성 동맹의 확산이 더뎠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일자리는 무자비할 정도로 줄었고, 수많은 노동자들은 일단 해고당한 뒤 더 낮은 임금에 복지 혜택도 거의 없다시피 한 비(非)노조원 자격으로 재고용되었다. 임금 인상은 중국이나 인도 같은 저임금 국가로 설비 이전이나 해외 아웃소싱을 통해, 혹은 그렇게 하겠다는 위협만으로도 억제되었고, 납품 업체와 그 종업원들은 지속적인 단가 인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정부 또한 법인세가 낮고 기업 보조금이 많은 나라로 설비를 재배치하겠다는 위협으로 인해 끊임없이 법인세 인하 및 보조금 확대 압력에 휘둘려야 했다. 그 결과 소득 불균형은 극심해졌고, 그런 속에서 미국과 영국 국민 대다수는 전례없는 규모의 빚을 지지 않고서는 겉만 번드레한 번영에 동참할 수 없게 되었다. (P 42)
시장에 맡겨 두기만 하면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타당하고 공평한 임금을 받게 될 것이라는 널리 알려진 주장은 신화에 불과하다. 이 신화에서 벗어나 시장의 정치성과 개인 생산성의 집단적 성격을 이해해야만 더 공평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개인의 재능과 노력뿐 아니라 역사적 유산과 축적된 집단적 노력까지 적절히 고려해서 개인의 노동에 대한 보상이 행해지는 사회 말이다. (P 56)
- 장하준 지음(김희정 · 안세민 옮김). 경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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