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지털기2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2)

이문형 2012. 3. 6. 01:13

<봉지털기 237-2>

롤스가 말하는 정의의 원칙을 권리개념으로 말하면 제1원칙은 자유권과 관련이 있고 제2원칙은 평등권 혹은 요즘 말하는 사회권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 둘은 가끔 충돌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예를 들면 경제적 평등이 요구되는 경우 자유를 유보할 수 있을까. 이것은 개발독재 시대에 왕왕 제기되는 딜레마다.

우리에게도 1970~1980년대 수많은 사례가 있다. 독재자의 논리는 우선 성장을 해야 하니 그동안은 자유를 잠시 유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를 위해 독재를 인정해달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롤스는 이에 대해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롤스는 말한다. 만일 자유와 경제에 서열을 만들 필요가 있다면 단연코 자유가 먼저라고. (p 77)

 

자유경쟁과 시장의 조절기능을 들먹이며 그것이 경제를 움직이는 지고의 원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철학을 우리는 자유주의 경제철학이라 부른다. 이러한 철학은 산업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장자본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소위 경제는 보이지 않는 손(이를 ‘시장’이라 한다.)에 의해 조절되는 것이니 국가는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다. 국가는 그저 사람들의 자유로운 계약과 그 이행이 이루어지도록 질서만 잡아주면 되지 그 이상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괜히 국가가 나서면 될 일도 안 된다. 작은 정부가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철학은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을 맞이해 근본적인 회의에 부딪혔다. 바야흐로 케인지안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국가의 개입이 정당화되고 그것 없이는 경제가 돌아가지 않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다시 60년 후 세 번째 밀레니엄을 맞이하면서 세상은 자유주의 물결이 넘친다. 신자유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이 철학은 우리 경제에 대해 개방, 민영화, 자유화, 시장주의라는 이름의 정책을 줄기차게 요구한다. 이들은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죽을 것이고, 살기를 원하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고 우리를 세뇌시킨다. 이것이 우리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이 현실이 소름 끼치지 않는가.

칼 폴라니.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시점인 1944년에 한 권의 책을 쓴다. 『거대한 전화』(홍기빈 옮김)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기조정과 자유로운 경쟁에 의한 시장자본주의는 하나의 유토피아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꿈에서 깰 것을 강조한다.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 인간은 그야말로 신체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삶의 환경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94쪽 (p 103)

 

사람을 진짜 다룰 줄 아는 사람은 강압적인 물리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이고 관념적이어야 한다. 예컨대, 계량화를 통한 비용-효과분석을 형사정책에도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합리주의적 사고가 아닌가. 이런 사고의 결과가 바로 신체형에서 감옥이라는 새로운 제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감옥의 탄생은 단순한 형벌제도의 변화가 아니다. 푸코는 이 변화가 18세기 말부터 본격화된 인간과 사회를 합리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규율사회’의 건설이라는 측면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본다.

감옥은 그 규율사회의 하나의 전형일 뿐이다. 푸코에 의하면 규율사회는 감옥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학교, 병원, 군대, 공장 등 주요한 사회기관 모두는 알게 모르게 공통적으로 인간의 신체에 관한 과학적인 관리법을 적용하여 예속적이고 복종적인 인간을 만들어 내는 곳이다.(P 121)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가 말한 것을 우리 주변에 좀 응용을 해보자. 푸코는 근대 사회의 권력의 속성은 유순한 신민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만일 푸코가 이 나라에서 살았다면 무엇을 보고 자신의 이론을 적용했을까.

분단국가에서 살아온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회적 규율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푸코가 보기엔 유순한 신민을 만들어내는 장치는 부지기수로 많은 사회다. 그 가운데서 예날에 아무도 그 문제점을 생각하지 못한 국민체조 하나만 생각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인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국민체조라는 것이 성행했다. 학교는 물론, TV를 틀어도 아침에는 국민체조를 했다. 바로 이것이 푸코식 신체 조종의 정치기술이다. 국민체조를 통해 대한민국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특정의 규율체제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신체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지배한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똑같은 생각을 가져야 하며 일탈은 허용되지 않는다.

거기에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태극기 앞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한다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전형적인 인간이 탄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탄생한 대한민국 국민은 주체적인 인간이기보다는 권력자의 신민으로서 유순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도 도도히 흘러가는 권력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방해를 한다면 그에게는 반역의 낙인이 찍혀 이 사회에서 살기 어렵다. (P 124)

 

1963년, 저명한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한 권의 책을 출판한다. 이름하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김선욱 옮김)이다. 아렌트는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의 공작에 의해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이스라엘로 압송된 아이히만의 재판을 방청한다. 많은 사람들은 수 십 만의 유태인들을 독가스실로 보낸 아이히만이야말로 가학적인 괴물 중의 괴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에서 본 아이히만은 그런 괴물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는 책상 앞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일을 너무도 성실하게 처리한 한 관료에 불과했다. 어디에서도 괴물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런 경험 끝에 그녀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P 137)

 

 

- 박찬운. 강의서.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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