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지털기 236-5>
“집기양단執基兩端, 용기중어민用基中於民”이라는 말에서 비로소 중용이 가운데가 아니라는 의미가 비로소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 말과 관련된 유명한 공자 자신의 독백이 『논어』(9-7)에 나오고 있다. 공자가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박식하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자문한다. “과연 내가 뭘 좀 아는가? 아니야!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어. 그런데 말이야! 비천한 아해라도 나에게 질문을 하면, 비록 그것이 골빈 듯한 멍청한 질문이라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그 양단의 논리를 다 꺼내어 두드려보고 그가 납득할 수 있도록, 있는 성의를 다해서 자세히 말해준다. 그래서 내가 좀 아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지.”
공자는 말한다 : “오로지 중용에 의지하여 세상을 등지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아니 한다 할지라도 후회함이 없다. 이것은 오직 성자만이 능할 뿐이다.” (P 165)
고대사회에는 매스컴이 없었다. 신문도,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없었다. 텔레비전이래야 백남준이 말하듯이 만인이 같이 보는 “달”만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민중을 소통시키는 가장 강력한 매스컴의 언어가 “노래”였다. 인류의 모든 고대경전이 노래들이다. 그리고 정부가 국민과 소통하는 방식은 “예禮”였다. “예禮”는 “역歷”의 반포와 관련이 있다. 일 년 사시가 어떻게 돌아간다는 것을 예로써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고대사회를 말할 때, “예악禮樂”이라는 말을 같이 쓰는 것이다. 예악은 고대사회의 민중제도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중용』에서 “시詩”를 인용하는 것은 『신약』에서 『구약』의 구절들을 인용하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하면 된다. (P 193)
사랑은 나를 기준으로 하는 “베품”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타인에 대한 모든 적극적 행위에는 “형이상학적 폭력”이 개재되기 쉽다. 그러한 폭력을 배제하기 위하여서는 극히 제한적인 부정태의 보편성만을 실천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어다.”가 아니라,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지어다.”라는 부정형의 명제만이 인간세에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베풀지 않으면 해악은 최소화된다. …생략…
『노자』를 추해한 왕필의 다음과 같은 명언에 한번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 “사랑하지 마라! 사랑을 하기만 하면 반드시 만들고 , 세우고, 베풀고, 감화를 주고, 은혜가 있고 함이 있다. 만들고, 세우고, 베풀고, 감화를 주면, 만물은 스스로 자기를 잘 가꾸어 나가는 데 오히려 그들의 참모습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은혜가 있고 함이 있으면, 사물들이 치우치게 되어 공존의 미덕을 상실한다. 우리가 실천해야 할 것은 아가페적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지 아니 함“의 인류애이다. (P 199)
“하나님”이라는 언言이 있다고 한다면, 그 언은 반드시 행行으로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만 한다. 철학의 과제는 궁극적으로 나의 주체적 내면의 도덕성을 개발하여 성인이 되고자 하는 데 있다. “성인이 된”은 궁극적으로 언이 아니라 행이다. 그러나 언 또한 행을 위한 위대한 방편이다. 그러나 언과 행의 단순한 일치는 양자의 고착을 의미한다. 언은 행으로 옮겨져야 하고, 또 행의 과정에서 새로운 언이 만들어져야 한다. 새로운 언은 또다시 새로운 행을 창조한다. 언과 행의 끊임없는 변증법적 교섭의 관계가 바로 “중용”이다. (P 200)
군자는 천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요행을 기다린다. 군자의 덕성은 활쏘기와 같다.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P 207)
신神이라는 것은 펼친다는 뜻이다. 귀鬼라는 것은 움추린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비, 바람, 우레, 번개가 처음 발동할 때는 신이고, 비, 바람이 지나가고 우레가 멈추고 번개가 번쩍이지 않고 조용하면 곧 귀이다.
“귀신”이란 음양의 소장消長일 뿐이다. 정독화육亭毒化育이나 풍우회명風雨晦冥에도 다 소장消長의 법칙이 있다. 정精이 백魄인데, 백은 귀鬼가 성盛한 것이다. 사람의 기氣는 혼魂인데, 혼은 신神이 성한 것이다. 정과 기가 합쳐져서 사람이 될 뿐 아니라 온 만물이 되는 것인데, 그렇다면 만물에 귀신이 없는 것이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P 216)
우리나라 5만원권 지폐에 이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그 호는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신씨 자신이 지은 것이다. 율곡의 삶이 어머니의 뜻에 미치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아호에는 참으로 거대한 혁명과 창업의 뜻이 숨겨져 있다. (P 239)
- 도올 김용옥. 철학. 중용 인간의 맛. 통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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