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지털기 236-6>
공자께서 또다시 말씀하시었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지知에 가깝고, 힘써 행하는 것은 인仁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勇에 가깝습니다. 이 세 가지를 알면 과연 내 몸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내 몸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를 알게 되면 타인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타인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알게 되면 천하국가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P 260)
순자가 군도君道에 관하여 언급한 것이다.
“유란군有亂君, 무란국無亂國 ; 유치인有治人, 무치법無治法。” 세상을 어지럽히는 군주는 있으나, 세상을 어지럽히는 나라라는 것은 있어본 적이 없다.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은 있으나, 세상을 다스리는 법이라는 것은 있어본 적이 없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은 “군주”지 “나라”가 아니라는 뜻이요.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사람”이지 “법”이 아니라는 뜻이다. (P 264)
병든 자의 救病도 중요하지만 병들지 않은 자의 防病도 중요하고, 병든 개인의 구원도 절박하지만 병든 사회의 구원은 더 절박한 것이다. 미친놈이 차를 몰고 사람을 마구 치어대는데, 뒤따라가면서 치료만 하기보다는 우선 그 운전대를 뺏어야 한다는 독일 신학자 본회퍼의 절규를 우리는 망각해서는 아니 된다. 본회퍼는 교회가 세계를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리스도교는 비종교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이” 행동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케리그마를 외치며 그는 히틀러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 그는 1945년 4월 9일 이른 아침에 39세라는 젊은 나이로 처형되었다. (P 273)
“성지자誠之者”는 택선이고집지擇善而固執之 하는 범용한 인간의 노력이다. 성인의 경지는 天의 경지요, 善을 택하여 고집하는 범용한 사람의 경지는 人의 경지이다. 그러나 인과 천의 거리는 결코 멀지 않다. 인은 끊임없이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辯, 독행獨行하면 天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 박학과 심문을 합쳐서 우리가 쓰는 학문學問이라는 단어가 생겨났고, 신사와 명변을 합쳐서 우리가 쓰는 사변思辨이라는 단어가 생겨난 것이다. 학문과 사변은 지知의 세계이고 독행은 행行의 세계이다. 지행합일의 노력하는 과정 그 자체가 결국 인간을 하느님으로 만든다. 남이 한 번에 능하다고 하면 나는 백 번을 하라! 남이 열 번에 능하다고 하면 나는 천 번을 하라! 인일능지기백지人一能之己百之, 인십능지기천지人十能之己千之! 어려서부터 내 인생의 좌우명이었다. (P 279)
서양의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신인데 우리 전통 속의 삼위일체는 하늘, 땅, 인간이라는 이 엄연한 사실도 기억하고 넘어가자! 성부, 성자, 성신이 한 몸이 되는 것이 좋을까, 하늘, 땅, 인간이 한 몸이 되는 것이 좋을까? 이 땅의 젊음이들이 두고두고 비교해서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P 291)
맹자도 인간의 경지의 단계를 6단계로 설정하여, “善人 → 信人 → 美人 → 大人 → 聖人 → 神人”을 말하였는데, “聖人”의 덕성에는 반드시 “化”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化라는 것은 우리가 보통 쓰는 감화感化라는 말과 상통하는 것인데, 그 감화의 본뜻은 영향을 준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근원적인 패러다임 쉬프트를 이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격체에 있어서는 어떤 “아이덴티티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성인은 「학기學記」의 말을 빌리면 “화민성속化民成俗”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자기가 속한 문명의 패러다임을 근원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학기」의 저자는 “군자여욕화민성속君子如欲化民成俗, 기필유학호其必由學乎! ”라고 외치고 있는데, 우리가 결국 “배운다”는 것은 “화化”를 이룩하기 위함이라는 뜻이다. 또 배우지 않고 “화化”를 이룩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P 295)
제25장 〔성자자성장誠者自成章〕
성誠은 스스로 이루어가는 것이요, 도道는 스스로 길지워 나가는 것이다. 誠은 物의 끝과 시작이다. 성하지 못하면 물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誠해질려고 노력하는 것을 삶의 가장 귀한 덕으로 삼는다. 성이라는 것은 인간 스스로 자기를 이룰 뿐 아니라 동시에 반드시 자기 밖의 모든 物을 이루어 줌으로써 구현되는 것이다. 자기를 이룸을 인仁이라 하고, 나 이외의 사물을 이룸을 지知라 한다. 인과 지는 인간의 性이 축적하여 가는 탁월한 덕성이며, 인간존재의 外와 內를 포섭하고 융합하는 道이다. 그러므로 誠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여 지더라도 반드시 그 사물의 마땅함을 얻는다. (P 303)
“소덕천류小德川流, 대덕돈화大德敦化”라는 명제도 같은 공존·상생의 논리를 말해주고 있다. 소덕은 소덕 나름대로 유니크한 의미가 있으며, 대덕은 대덕 나름대로 포괄적인 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소덕의 작은 천류와 같은 흐름이 없이는 대덕의 거대한 돈화가 있을 수 없다. “돈화敦化”에 化라는 근원적인 변화의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세혈관의 충실한 작용들이 있어야 우리 몸의 대동맥의 대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유기체적 세계관에 있어서는 이러한 소덕과 대덕의 유기적 작용의 통합이 중요하다. 우리나라 서울 창덕궁의 대문의 이름도 “대덕돈화大德敦化”에서 온 것이며, 남대문의 이름은 존덕성장(제27장)의 “돈후이숭례敦厚以崇禮”의 마지막 두 글자에서 온 것이다. (P 337)
- 도올 김용옥. 철학. 중용 인간의 맛. 통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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