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지털기 243-3>
거칠게 말해 사마천은 천재다. 그 까닭은 '호견법'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사기의 체제를 살펴보자. 사기는130권, 52만 6,500자로 이루어져 있다. 방대한 역사책이다. 추대 사람들은 사기의 서술 기법 가운데 '호견법'이란 것을 끌어냈다. 또 이 기법으로 인해 사기의 내용이 더욱 흥미롭다고 평가한다. 예를 들어 오자서에 관한 이야기는 <오자서 열전>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초세가>에도 나오고 다른 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자객 전제는 <오자서 열전>에도 나오고 <자객 열전>에도 나온다. 오자서란 한 인물의 개성이나 특징 등을 여기저기 나누어 서술함으로써 보다 심도 있게 비교할 수 있도록 안배한 것이다.
또 다른 대표적인 경우가 한고조 유방이다. 사마천은 유방의 성격 묘사를 보다 극적으로 하기 위해 관련 기록을 여기저기 분산시켰다. 유방은 황제이기 때문에 당연히 <고조 본기>에 배치해야 한다. 사마천이 살았던 서한 왕조의 개국 황제이다 보니 함부로 다룰 수 없었다. 사마천은 유방에 관한 정식 기록인 <고조 본기>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비판적인 기록과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실을 우선 배치했다. 그리고 유방의 단점이나 사마천의 개인적 관점은 다른 곳으로 분산시켰다. 바로 이것이 '호견법'이다. 그 결과 사마천은 유방의 라이벌로서 5년 가까이 유방과 접촉했던 항우의 기록인 <항우 본기>에 유방의 약점이나 문제점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 견해를 분산시켰다. (중략)
가령 항우가 싸우다 유방이 쫒기는 장면이 있다. 유방은 아들 효혜(유방의 적자인 혜제 유영)와 딸 노원 공주를 수레에 싣고 정신없이 도망쳤다. 항우의 기병이 번개처럼 추격했다. 수레에 탄 인원이 많아 수레가 무겁다고 생각한 유방은 아들과 딸을 차례로 수레 아래로 던져 떨어뜨렸다. 등공이 매번 내려가서 이들을 들어올려 수레에 태웠는데 이렇게 하기를 무려 세 차례였다. 이렇듯 유방은 매정한 아버지였다. 또 유방의 아버지가 항우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의 일이다. 항우가 항복하지 않으면 아버지를 팽형에 처하겠다고 협박하자 유방은 태연하게 '삶거든 나한테도 한 그릇 보내라!' 는 반응을 보였다. 사마천은 이런 내용을 <고조 본기>에 배치하지 않고 <항우 본기>에 슬쩍 끼워넣었다. 그렇게 해서 읽는 이들에게 <고조 본기>와 <항우 본기>를 서로 비교하게 함으로써 유방의 매정하고 잔인한 일면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게 한 것이다. (P 132)
요리는 키도 작고 삐쩍 마르고 가냘픈 체형에 몰골도 형편없었다. 합려는 요리가 칼이나 제대로 들 수 있을지 의문스러워하며 실망스러워했다. 그런데 요리가 합려에게 다가가 귀엣말로 속삭였다. 일을 해 나가는 데 뜻도 중요하고, 용기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치밀한 계획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합려는 요리와 함께 경기를 암살하기 위한 치밀한 작전 수립에 들어갔다.
먼저 두 사람은 궁중에서 검술 연습을 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러고는 요리의 칼이 합려의 손을 살짝 베었다. 합려는 군주를 상해한 죄로 요리의 팔을 잘라버렸다. 요리는 원한을 품고 도망쳤다. 그러자 화가 치민 합려는 요리의 식솔을 죽이고 그 시체들을 태워버렸다. 타고 난 시체의 재도 사방 천지에 뿌렸다. 이 모든 것이 세간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연출되었다. 그리고 이 기가 막힌 이야기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영화 <무간도>처럼 어떤 것이 진짜 모습이고 어떤 것이 가짜 모습인지 헷갈리는 상황이었다. 연출된 칼싸움을 했지만 실제로 팔을 잘랐고, 일부러 요리가 도망을 갔지만 실제로 식솔들을 죽여버렸다.
요리의 사건은 워낙 큰 스캔들로 오나라 사람들이 전부 알게 되었다. 결국 경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경기는 요리가 자신을 찾아오자 크게 기뻐하며 반겼다. 둘은 잠자리와 식사를 같이할만큼 가까워졌다. 끝내는 힘을 합쳐 합려를 제거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두사람은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오나라로 향했다. 한순간 갑자기 등 뒤에서 강한 강바람이 불었다. 바로 그때 뱃머리에서 풍광을 구경하던 경기의 등에 요리의 칼이 박혔다. 강한 바람의 힘을 빌린 요리의 칼은 경기의 몸속 깊숙이 박혔다. 경기는 천하장사였다. 요리를 덥석 들어 강물 속에 처넣었다. 그리고는 요리를 물에 빠뜨렸다 건졌다를 반복했다. 부하들이 달려들어 요리를 죽이려 하자 경기는 '요리가 저런 몰골로 나를 단칼에 죽일 정도면 보통 사람이 아니고 용기있는 사람이니 살려주라'고 했다. 등에 박힌 칼을 빼니 피가 솟구쳤고 경기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구사일생으로 요리가 돌아오자 합려는 큰 상을 내렸다. 하지만 요리는 도저히 낯을 들고 살아갈 수 없었다. 세 가지 죄목을 자진해서 꼽으며 죽음을 자청했다. 첫째,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처자식을 죽게 한 어질지 못한 죄. 둘째, 새 왕을 위해 선왕의 아들을 살해한 의롭지 못한 죄. 셋째, 왕의 소망은 이루었지만 자신은 패가망신한 지혜롭지 못한 죄였다. 결국 요리는 자살했다. 요리는 경기가 죽으면서 자신을 살려준 것에 큰 충격과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P 140)
1호 갱은 가장 큰 구덩이로 보병 위주다. 2호 갱은 기병과 보병이 혼재되어 있으며 3호 갱은 사령부이다. 4호 갱은 만들다가 중단되었다. 그리고 병마용갱이 발굴된 그 자리에 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돔을 씌워 그대로 전시한다. 중국의 고고학 발굴과 박물관의 기본 원칙은 발굴한 자리에 박물관을 세우는 것이다. 유물 위주 발굴이 오랫동안 이루어져 귀중품이 나오면 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해온 우리와 많이 다른 점이다. 병마용갱이 1980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돔을 씌워둔 1호 갱이 먼저 위용을 드러냈으며 이어 2호 갱, 3호 갱이 공개되었다. 그다음에 전시관이 만들어졌다. (P 157)
저우언라이다. 평생을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으며 아무 것도 갖지 않고 살다 간 사람이다. 죽거든 화장해 뼛가루를 조국 산천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유언대로 뼛가루가 비행기에서 중국 산천에 뿌려진 사람이다. 자식도 남기지 않았다. 부인도 소박하게 살다가 아무런 재산도 남기지 않고 떠났다. 중국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두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거의 제갈량과 저우언라이를 꼽는다. 두 사람 모두 청렴결백의 상징이다. (P 159)
- 김영수. 역사서. 난세에 답하다 (사마천의 인간 탐구). 알마
'봉지털기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난세에 답하다 (5) (0) | 2013.05.05 |
---|---|
난세에 답하다 (4) (0) | 2013.04.19 |
난세에 답하다 (2) (0) | 2013.03.27 |
난세에 답하다 (0) | 2013.03.12 |
고사성어 문화답사기 (3) (0) | 2013.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