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빚이 있었다 / 최정란
요나는 선경아파트에 산다,
그런데 늘 주소를 성경아파트라 쓴다
혼자 두면 집을 나가 길을 잃지만
자존심 강한 요나는
길 잃은 게 아니라고 우긴다
낮 동안 요나는 복음요양병원,
치매노인 주간보호시설에 보내진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이름이 따로 있지만 요나라 불린다
요나는 요양병원을 고래라 부르고
나무를 수염이라 부른다
고래 뱃속에서 요나는 성경 한 구절만 필사한다
태초에 빚이 있었다,
늘 받침이 틀리지만
빛이라고 간호사는 고쳐주지 않는다
바벨탑의 대변인이 뉴스를 전한다
티비의 자막에 가구당 빚의 액수가 적혀나온다
태초에 빚이 있었다
그 받침, 틀린 게 아니다
요나에게 세 아들이 몸을 빚졌다
배를 타는 선장이던 셋째 아들이 십 년 째
집에 오지 않는다
헤어나지 못할
큰 빚의 풍랑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잠시만 혼자 두면 요나는
길 잃은 아들을 찾아 길을 잃는다
불경과 논어 옆 골목, 선경과 성경 사이,
산해경 반점 앞에서
요나의 만경창파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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