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2

태초에 빚이 있었다 / 최정란

이문형 2012. 3. 8. 01:57

   태초에 빚이 있었다  /  최정란

 

 

요나는 선경아파트에 산다,

그런데 늘 주소를 성경아파트라 쓴다

 

혼자 두면 집을 나가 길을 잃지만

자존심 강한 요나는

길 잃은 게 아니라고 우긴다

낮 동안 요나는 복음요양병원,

치매노인 주간보호시설에 보내진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이름이 따로 있지만 요나라 불린다

요나는 요양병원을 고래라 부르고

나무를 수염이라 부른다

 

고래 뱃속에서 요나는 성경 한 구절만 필사한다

태초에 빚이 있었다,

늘 받침이 틀리지만

빛이라고 간호사는 고쳐주지 않는다

 

바벨탑의 대변인이 뉴스를 전한다 

티비의 자막에 가구당 빚의 액수가 적혀나온다

태초에 빚이 있었다

그 받침, 틀린 게 아니다

 

요나에게 세 아들이 몸을 빚졌다

배를 타는 선장이던 셋째 아들이 십 년 째

집에 오지 않는다

헤어나지 못할

큰 빚의 풍랑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잠시만 혼자 두면 요나는

길 잃은 아들을 찾아 길을 잃는다

 

불경과 논어 옆 골목, 선경과 성경 사이,

산해경 반점 앞에서

요나의 만경창파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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