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지털기 236-4>
공자는 군자와 소인을 가를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개념이 바로 “중용”이라고 언명한다. 중용을 실천하면 군자이고, 중용을 실천하지 않으면 소인이라는 것이다. (P 101)
중은 가운데가 아니다. “발이개중절發而皆中節”의 “중절中節”이요 “중절”이라 함은 “절節”이라는 상황성이 중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모든 “중中”은 “시時” 속에 있다는 것이다. “시時”라는 것은 객관적·절대적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상황성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가치는 시時 속에 있다. …중략… 인생이란 타이밍의 예술이다. 중이란 오직 적절한 시를 만날 때만이 중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제갈공명을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의 모든 움직임이 시時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P 103)
중용의 “용庸”은 “범용凡庸”과 “항상恒常”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자는 말씀 하신다. 삼 개월만 철저히 중용을 지킬 수 있어도, 그 후로는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그냥 굴러가게 된다고… 선종의 바이블이라고 말할 수 있는 『벽암록』에도 “일면불日面佛, 월면불 月面佛”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문에 대하여 신묘한 해석을 가하지만, 나는 “낮에는 해를 보는 부처처럼, 밤에는 달을 보는 부처처럼” 그저 묵묵히 세월을 견디는 돌부처 같다는 뜻으로 새긴다. 그런데 공자는 삼 개월만 철저히 중용을 지킬 수 있어도 일면불 월면불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과연 그럴까? 그대 스스로 시험해보라! 중용이란 삼 개월을 지속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인간에게 “영원”이라는 숫자는 희노애락의 삶의 시간의 삼 개월과 상통한다는 이 공자의 말씀 속에는 허황된 진리를 추구하지 말고 구체적인 삶의 지속을 추구하라는 당부가 들어있다. (P113)
절제 없는 맛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음식의 맛이란 소금이나 기타 재료들의 절제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절제 없는 멋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옷의 아름다움도 결국 절제의 미학이다. 따라서 맛이야말로 중용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맛은 인간의 몸과 마음의 궁극적 도덕성이다. (P 119)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할 지어다.라고 말한 것은 결코 언어적 개념의 조작에 의한 어떠한 논리적 결구도 근원적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는 하나의 새로운 정직한 케리그마를 서양 철학사에 제시한 것이다. (P 126)
"우환“이란 ”대의大義“와 관련된 것이다. 대의란 나의 존재가치를 인간세의 보편적 가치로서 실천적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나의 생명가치라는 것은 도덕적 실천에 내재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인간이라는 자기생명이 일차적으로 탐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정욕생명이 강렬한 만큼, 도덕생명 또한 강렬한 것이다. 인간은 하루하루의 우환의식 속에서 도덕의식을 생산한다. (P 128)
“은오이양선隱惡而揚善”의 “惡”는 추하다는 의미의 “오”이지, “善”과 실체적으로 대비되는 “악惡”이 아니다. “선·악”이라는 말은 서양말이지, 우리말이 아니다. “善”의 반대의미로 짝을 짓는 말은 “不善”이지 “악惡”이 아니다. 惡은 오로서 미와 짝을 이루는 말이다. 추함은 악이 아니다. 얼굴이 못생겼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악한 것은 아니다. 추한 것도 아름다움에 기여하는 적극적 가치일 뿐이다. (P 137)
- 도올 김용옥. 철학. 중용 인간의 맛. 통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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