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줄에 삶을 널다 / 이문형
세탁기에서 탈수된 빨래를 꺼내려다
마구 뒤엉킨 가족사를 본다.
아니, 삶의 한 단면을 본다.
팬티 양말 브래지어 와이셔츠 운동복 속치마
작업복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지와 동전까지
어느 게 누구의 형상이랄 것도 없이
아내의 퀭한 삶과 아들의 고뇌와
나의 지친 행적이 지독하게 얽혀
햐! 뭉뚱그려진 한통속.
세상을 부유하다가
애초부터 하나였다는 듯 뒤섞여
세상 사는 일이 결국 때 벗는 일이라고
살아온 노동의 땟물이 빠질 때까지 부대끼며
돌고 돌아 인정人情에 수없이 일렁이다
서로가 서로를 헹구고 속죄하는 삶.
세탁기 속에 탁, 탁, 고통을 털어내고
서글펐던 마음까지 말끔하게 씻겨
한때 낡고 후줄근한 허울
희디흰 옥양목인양 선뜻 알몸에 두르고
투명한 햇살 받아 지난 세월 증발시키고 나면
우리네 사는 곳도 어느덧 말간 세상이었으면 좋겠다고
경건한 자세로 삶을 하나하나 풀어 빨래줄에 넌다.
「바람 그리기」시편 : 책나무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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