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지털기 245-2>
2009년 10월 3일자의 '시간 속의 수호자들'에 대한 기사도 아주 좋습니다. "문제는 세계 각 실험실에서 고유한 시계 유형을 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유형들을 상호 비교할 수단이 없다면 그러한 개발은 별 의미가 없다고 파리천문대에 위치한 국립도량형측정연구소 산하 SYRTE(시공간 기준계) 연구팀의 원자분수시계 분야의 개척자 앙드레 클레롱은 지적한다. (P 87)
그렇기 때문에 어떤 발화체에 대해서든 그것이 긍정문의 형태로 되어 있는가, 부정문의 형태로 되어 있는가를 논하게 되는 것입니다. '양태의 부여'modalisation는 옷의 원산지, 품질, 가격을 결정하는 라벨에 해당합니다. 물론 우리는 라벨이 아니라 옷을 삽니다. 하지만 라벨이 없다면 내가 사는 옷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안심할 수 없을 테지요.
인용부호로 묶느냐 마느냐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하나요? 세계의 중요성이 달려 있습니다. 어떤 인용부호도, 어떤 조건법도 필요로 하지 않는 발화체는 세계로부터 구분되지 않는다는 특성을 지닙니다. 그런 발화체는 '자연스럽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P 92)
나는 기술도 자연스러워지는 순간부터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P 93)
독자는 언제나 증명하는 것보다 '좀 더 단순한' 요소들을 건드리게 되지요. 이따금 학생들은 매우 복잡해 보이는 학술 문건이 실제로는 한결 단순한 기입들에 근거해 있음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물론 이 단순함의 대가는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한 기입들은 얻기까지 오랜 작업 시간이 소요되니까요. 하지만 지각적 판단 자체는 단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논증은 쓸모없을 테니까요. 논증에 대한 의혹이 들 때에는 항상 눈으로 검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숫자들의 표나 방정식이라면 이야기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보이는 것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P 104)
과학과 정치, 증명과 수사학 사이의 그 어떤 구분도 과학적 증거가 곤란을 겪어가며 천천히 획득된다는 이 흥미로운 현상은 '기술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구분에는 한 가지 목적밖에 없습니다. 이성의 힘이 오랫동안 비이성의 힘에 밀리다가 마침내 최종적인 승리, 필연적인 승리를 거둔다는 식으로 장대한 논쟁의 역사를 구성하려는 목적 말입니다. 이러한 구분들은 논쟁적입니다. 이것들은 '싸움'의 개념들이지요. 이 싸움은 아마도 정당화되겠지만 이 싸움 때문에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 있다면 그게 바로 과학입니다. 아이스킬로스의 말마따나 "전쟁의 첫 번 째 희생자는 과학에 대한 진실이랄까요. 그래서 내가 우리는 과학의 역사에 대해서 합의를 볼 수 없고 합의를 보아서도 안 된다고 몇 번이나 경고했던 겁니다. (p 117)
패터 슬로터다이크는 '명시화'라는 용어를 제안했는데, 학생의 나라 독일에서는 이 사람이 많은 비판을 받지만 내가 보기에 이 단어는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역사는 명시화의 역사이지, 혁명이나 해방의 역사가 아니다." 그는 역사가 결코 과거와 단절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역사는 언제나 더 많은 요소들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우리는 그 요소들을 이용하여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 요소들은 기존에 있던 요소들과 양립할 수 있거나 그러지 못하게 될 거고요. (P 133)
- 브뤼노 라투르. 과학인문학. 과학인문학 편지. 사월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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