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지털기2

통섭 (8)

이문형 2013. 1. 30. 02:11

<봉지털기 241-8>

정언명령은 일체의 다른 고려와는 별개로 그 자체만으로도 선하며 다음과 같은 규칙을 통해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는 동시에 네가 바라는 준칙이 되도록 행위하라." 가장 중요하고 또 초월론적인 당위는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다. 칸트에 따르면 자연은 원인과 결과의 체계적인 반면 도덕적 선택은 자유 의지의 문제인데 자유 의지에는 인과 관계가 없다. 도덕적 선택을 하거나 단순한 본능을 넘어설 때 비로소 인간은 자연의 영역을 초월하여 자유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자유의 영역은 유일한 이성적 존재인 인간에게만 허용된다.

이렇게 보면 좀 위안이 되는 것도 같지만, 이것은 물질적인 존재자의 견지에서 볼 때 또는 상상 가능한 존재자의 견지에서 볼 때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P 430)

 

종교는 영혼의 암흑상태로부터 빛으로 나아가는 영적 여행이 가능하다는 전망을 보여 준다. 몇몇 특별한 사람에게는 이런 영적 여행이 생전에 가능하다. 마음은 더 고차원적인 깨달음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일정한 방식으로 성찰을 거듭하여 드디어 더 이상의 진전이 불가능한 시점에 이르면 전체와의 신비한 통합 상태에 진입하게 된다. 위대한 종교들 가운데 이와 같은 깨달음이 표출되고 있는 것으로 는 힌두교의 사마디(samadhi, 선정, 삼매, 즉 명상의 최고 경지) 선불교의 득도, 수피교의 파나, 도교의 무위, 오순절 기독교도의 부활 등이 있다. 이와 유사한 깨달음은 환각에 빠진 문자 이전 시기의 주술사들도 경험했다. (P 449)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초월적 존재와 불멸에 대한 충동은 매우 강렬하다. 초월론은 특히 종교적인 믿음을 통해 강화될 때 심리적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워진다. 그것은 어쨌거나 옳다는 느낌을 준다. 이와 비교하면 경험론은 메마르고 부적절해 보인다. 궁극적 의미를 모색하는 여행에서 초월론자의 길을 따르는 것이 훨씬 쉽다. 바로 이것이 경험론이 아무리 마음을 파헤친다 해도 초월론이 계속해서 인심을 얻고 있는 이유이다. 과학과 종교가 충돌할 때마다 과학은 늘 종교적 도그마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보람도 없는 일이었다. (중략) 그것은 열정과 욕망이 진리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P 452)

 

우리는 행성의 궤도를 알고 있고, 그것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어림잡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무런 종교적 통찰도 없다. 적어도 성경의 저자들이 볼 때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P 455)

 

과학은 윤리와 종교 속에서 가장 흥미롭고 아마도 자신을 겸허하게 만드는 도전에 직면할 것이며, 반면 종교는 자신의 신빙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과학의 발견들을 한데 통합시키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내야만 할 것이다. 종교는 경험적 지식에 모순되지 않는 인류 최고의 가치들을 불후의 시적 형식 속에 집어넣을 수 있을 때 그만큼의 힘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강력한 도덕적 리더십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맹목적 신앙은 제아무리 열정적으로 표출된다 할지라도 충분하지 못하다. 과학은 자신의 자리에서 인간의 조건에 대한 모든 가정들을 가차 없이 시험대 위에 올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다 때가 되면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감정들의 기반이 발견될 것이다. (P 458)

 

20세기를 마무리하며, 자연과학은 복잡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새로운 근본 법칙을 찾는 일에서 새로운 종류의 종합-이것을 전일론이라 불러도 좋으리라-으로 그 초점을 옮겼다. 예컨데, 우주의 기원, 기후 변동의 역사, 세포의 기능, 생태계 조직 그리고 마음의 물리적 기초에 관한 연구 등은 복잡계를 이해하는데 그 목표를 두고 있다. 이런 탐구들에서 가장 잘 통하는 전략은 조직의 여러 수준들을 가로지르는 정합적인 인과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포생물학자들은 분자 집합체의 여러 수준을 넘나들며 연구하고 인지심리학자들은 집합적인 신경 세포들의 활동 양상에 관심을 기울인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P 461)

 

지식에의 접근은 결국 민주화와 전 지구화의 과정을 밟게 될 것이다. 우리는 곧 그 지식을 텔레비전과 컴퓨터 화면에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은 무엇일까? 대답은 분명하다. 종합이다. 우리는 정보의 바다에 빠져있기는 하지만 지혜의 빈곤 속에 허덕이고 있다. 따라서 세계는 적절한 정보를 적재적소에서 취합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며 중요한 선택을 지혜롭게 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돌아갈 것이다. (P 463)

 

- 에드워드 윌슨(최재천, 장대익 옮김). 학문. 통섭. (주)사이억스 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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