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에 대하여·3 / 오태환
1.
득통이라는 스님의 『금강경오가해설의』에 야부선사가 지은 것으로 나오는 게송은 널리 알려져, 글 아는 축 가운데에서는 거의 모르는 이가 없을 성싶다
竹影掃階塵不動 대나무 그림자가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고
月穿潭底水無痕 달빛이 못물을 꿰뚫어도 물 위엔 흔적 하나 남지 않네
위 책에서, 이는 야부가 "須菩提 菩薩亦如是 若作是言 我當滅度無量衆生 卽不名菩薩"이라는 송에 화답하여 지었다는 해제를 달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생몰시기와 비슷한 연대에 쓰인 송나라의 『밀암선사어록』과 고려의 『진각국사어록』에는 나란히 “良久云”를 붙여 이 시구가 ‘예로부터 일컬어진’ 것이라 언명한다 이런 까닭으로 야부가 지었다는 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모습이 자주 생긴다
허나 그 붓놀림의 맵시가 누구의 것이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부벽준의 바윗돌이 비바람에 닳아 가뭇없이 사라졌을지언정 원래 놓였던 자리의 맑고 단정한 기운은 늘 어엿한 법이다 이 미장센의 으리으리한 韻氣 앞에서 전거와 서지를 따져 뭘 바로잡으려는 시늉은 그저 거추장스럽고 부질없을 뿐이다
2.
1,000년 가까이 격절한 이 시구를 놓고, 나는 하릴없이 붓방아나 찧는 짓 외엔 달리 도리가 없겠다 物과 物의 경계를 지운 무욕과 정밀의 지극한 지경이라 일컫든, 하늘의 法과 땅의 度를 빌려 연화장계를 오마주했다 쓰든, 그냥 기운생동의 절경이라 갈기든, 나로서는 어떤 발묵과 설채의 註釋을 빌린 데도 달리 수단을 찾기 어렵다 그, 10호 명조체의 활자와 활자, 획과 획 틈새에 서린 공간의 사늘하고 밝은 淸虛라니
3.
北川의 희고 푸른 물살을 옆구리에 낀 왕복 2차선 이면도로를 타박타박 산책하는 중이었다 나는 두 걸음쯤 앞에서 버티고 선 송장사마귀 한 마리를 발견했다 우정 녀석의 코앞에 쪼그리고 앉아 빤히 내려보았다 녀석은 나를 의식했는지 톱니가 거칠게 돋친 종아리를 아스팔트바닥에 세우고 날개를 투명한 가위처럼 화들짝 펼쳐들더니, 급기야 낫 모양의 두 앞발을 마구 휘저으며 으름장을 놓았다 꽤 한산할지라도 자동차도로에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당장 머릿속을 스친 것은 당랑거철이라는 오래된 경구였다 그냥 놔두었다가는 들고나는 자동차바퀴 앞에서 그 운명을 가늠할 수 없을 터였다 나는 부근의 삭정이로 녀석을 집어 풀숲 저편으로 옮겼다
수풀 사이로 슬금슬금 사라지는 녀석을 지켜보는데, 왠지 가슴 한 구석이 큰물에 둑 무너지듯 서늘하게 허물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생각하면 그건 녀석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나에 대한 무참한 위로의 표지였다 올해로 데뷔한 지 28년째다 스스로 글로부터 유폐된 채 시와 언어를 완전히 작파한 10년을 오려내도, 나머지 18년은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그 18년간의 전 경로는 맨 처음 『채근담』에서 읽은 야부의 시구와 온전히 겨룰 수 있는 딱 한 구절을 얻기 위한 고단한 우회로였을 테다 그러나 그동안의 내 노력은 모두 그가 모는 만승전차의 기치창검과 무쇠바퀴 앞에서 젖심까지 쏟아내며 버티고 선, 한 마리 허술하고 성근 송장사마귀 깜냥에 불과했다
녀석이 사라진 방향의 서슬이 잠깐 환했다가 그늘졌다 나는 군청색 추리닝바지 바람에 슬리퍼짝을 끌며 마을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송장사마귀는 곧 가을이슬에 폭싹 젖은 채 고스란히 해체돼 스러지고 말 것이다 부시게 푸른 하늘을 前景으로 까마귀 두엇이 전봇대 위에서 까악까악 까르르르 짖어대고 있었다
4.
아아, 칼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있기는 한 것인가
'시2'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시 / 박경남 (0) | 2012.12.11 |
---|---|
도로봉 염소 / 김해자 (0) | 2012.12.03 |
지상시편 1부-6 / 안수환 (0) | 2012.11.07 |
나의 하느님들 / 문숙 (0) | 2012.10.30 |
부토투스 알티콜라의 춤 / 최문자 (0) | 2012.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