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지털기 241-2>
베이컨은 우리에게 금언, 삽화, 이야기, 우화, 은유 등을 사용하라고 충고한다. 그것들은 발견자가 독자들에게 진리를 그림처럼 분명하게 전달하는 수단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밀랍으로 만든 서판과 같지는 않다. 서판의 경우 옛 것을 문질러 지우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쓸 수가 없지만, 마음의 경우 새로운 것에 쓰지 않고는 옛 것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정신 과정을 정확히 밝힘으로써 학문의 모든 가지들을 가로지르는 추론 방식을 개혁하고자 했다. (P 69)
1807년에 윌리엄 워즈워스는 이성의 범위를 넘어서는 근원적이고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의 시는 훗날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우리 영혼은 불멸의 바다 풍경을 품고 있다.
우리를 이리로 이끌었고
한순간에 저리로 떠나보낼 수 있는,
해변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강대한 파도가 굽이치는 소리를 들어라.
워즈워스의 “말로 할 수 없는 힘의 호흡”을 통해서 눈은 감기고 마음은 높이 치솟으며 중력에 대한 거리의 역제곱 법칙은 날아가 버린다. 정신은 무게와 측정 단위가 미치지 않는 또 다른 실재로 들어가 버린다. 물질과 에너지에 속박된 우주를 부정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당당히 경멸하며 무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19세기 초반 50년 동안에 워즈워스를 포함한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들이 대단히 아름다운 작품들을 창조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다른 입으로 진리를 말했고 예술이 과학에서 멀어지도록 했다. (P 83)
계몽사상에 대한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대부분의 자연과학자들은 인간 정신세계에 관한 탐구를 포기했고 철학자와 시인은 한 세기 동안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양보는 뜻하지 않게 과학 전문가들을 이롭게 만들었다. 이로써 연구자들이 형이상학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를 거치면서 물리학과 생물학 지식은 급격히 성장했다. 동시에 사회학, 인류학, 경제학, 정치 이론 등의 사회과학은 기초 과학과 인문학 사이에서 만들어진 영지를 장악하며 새로 등장한 고위 귀족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지식의 거대한 가지들은 17세기와 18세기에 생성된 통일된 계몽사상의 비전에서부터 나와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으로 갈라져 현재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 (P 86)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학 비평 기법인 해체주의에서 명확히 표현된다. 작가들이 의미하는 바는 각자 고유한 것이고 그 기저에는 모종의 전제들이 있다. 따라서 작가의 진정한 의도뿐만 아니라 객관적 실재와 연관된 그 무엇도 신빙성을 획득할 수 없다. 작가의 텍스트는 비평가의 머릿속에 있는 유아론(唯我論)적 세계에서 유래된 신선한 분석과 논평에 열려있다. 그러나 비평가 또한 해체주의의 적용을 받고 비평가의 비평가 역시 마찬가지이므로 결국 무한 소급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해체주의의 창시자인 자크 데리다가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했을 때 의도한 바이다. 이것이 적어도 그와 그의 옹호자와 비판자의 글들을 주의 깊게 읽어 본 후에 내가 내린 결론이다. 만일 급직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제가 옳다면 내가 파악한 그의 결론이 정말로 그가 의도한 결론인지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 역으로, 만일 내가 파악한 것이 그가 의도한 것과 동일하다면 그의 논증을 더 깊이 고려해야 할지는 불분명하다. 내가 “데리다 역설”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이 퍼즐은 크레타 인의 역설(어떤 크레타 인이 “모든 크레타 인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문제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기는 하지만 긴급한 것은 아니다.
데리다의 현란한 몽매주의적(몽매주의는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고의로 의미를 애매하게 하는 표현주의 사조를 일컫는다. - 옮긴이) 진술들을 볼 때 그가 과연 자신이 의도한 바를 정확히 알고 있는지는 그리 분명치 않다. 어떤 이들은 그의 글이 의도적으로 일종의 농담, 즉 실없는 말을 써 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새로운 “과학”인 그라마톨로지는 실은 과학과 정반대의 것으로서 진부함과 환상을 동시에 가진 비일관적 꿈들의 단편이다. 그것은 문명세계의 다른 곳에서 발전한 마음과 언어의 과학에 대해 마치 췌장의 위치도 모르는 심령치료사처럼 무지하다. 그는 이런 일종의 태만함에 대해 의식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는 루소의 『에밀』에 나온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면서, 책과 글쓰기의 적이라고 자신을 규정했던 루소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철학은 우리에게 주어진 악몽이다. 당신은 나 역시 몽상가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이들이 하지 못한 것을 한다. 나는 내 꿈이 꿈이라 말하며,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 유용하다고 판명될지 모르는 것들이 그 꿈속에 있는지를 독자들이 찾아내도록 남겨 둔다.”
깨어 있기에, 깨어 있는 동안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과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유익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P 93)
오히려 동물들이 우리보다 빛에 대해 더 잘 안다.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시각 세계에 살고 있다. 즉 인간이 볼 수 있는 시각 스펙트럼 중 어떤 부분은 감지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시각 한계를 넘어서는 부분에 대해서는 오히려 더 민감하다. 나방은 꽃잎에서 반사된 자외선(파장의 길이가 400나노미터 이하)의 패턴에 따라 꽃가루와 과즙원을 정확하게 집어낸다. 우리는 노란 꽃과 하얀 꽃을 볼 뿐이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점들과 밝고 어두운 동심원들을 본다. 식물 진화의 산물인 이 패턴들은 가루받이 곤충을 꽃밥과 과즙원으로 안내하기 위한 것이다. (P 101)
- 에드워드 윌슨(최재천, 장대익 옮김). 학문. 통섭. (주)사이억스 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