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지털기 240>
걸을 때마다
나 자신과
내가 배워온 세계의
허위가 보였다. (P 1)
가령 아프리카에 가면 사물의 보이는 방식이 무의미해져요. 희한하게도, 가령 인도에서 태양이 돌이나 나무 따위를 비추면 그것의 배후에 이미지랄지, 존재의 의미가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는 반대예요. 빛이 비치면 사물에서 하나 둘 의미가 벗겨져 나가 단순히 ‘있다’는 것뿐인 세계가 되어갑니다. 옥수수 밭이며 고속도로며 반들반들한 흑인의 머리며, 그 모든 것이 등질(等質)의 빛을 띠기 시작하지요. 아프리카는 인도와는 다른 의미에서 원질(原質)의 세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돌이라고 하면 돌 말고는 다른 무엇도 아닌 세계지요. 인도에서는 돌이라고 하면 돌의 배후에 어떤 은유가 작용합니다. 어느 쪽이 대단하냐로 말한다면 인도는 더 깊고, 아프리카는 더 얽매인 데가 없어요. (P 42)
인도나 티베트를 다녀와서 신비를 팔아먹는 것은 일종의 사기입니다. 명상이란 것도 좋아하지 않아요. 신이란 말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 형식은 믿지 않습니다. 말없이 좌선을 하는 게 명상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요. 명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P 48)
화장하는 광경을 이십 일쯤 내리 촬영한 적이 있습니다. 불타고 있는 시신 근처에 가면 불길 때문에 엄청나게 뜨거워요. 나중에 보면 눈썹이 고불고불 그슬려 있기도 해요. 광각 카메라를 들고 머리 같은 게 불타오르는 곳으로 다가갑니다. 연기 속으로 들어가지요. 그렇게 이십 일쯤 지나면 시신 냄새가 몸에 배어버립니다. ……사진을 찍는 것과는 관계없이 모르는 사이에 죽음의 냄새가 들러붙어버립니다. 그건 것도 하나의 명상이지요. 모르는 사이에 한다는 게 좋아요. (P 49)
인도에 오래 있다 보면 점점 벌레처럼 되어갑니다. 인력이 강한 땅 같아요. 인력은 지구 위 어디나 똑같겠지만 땅이 끌어당기는 힘 같은 게 있어요. 땅의 힘 때문에 기진맥진해가는 느낌이 들지요. 그런데 티베트에 가면 하늘이 확 잡아당긴달지, 문득 고개를 들면 하늘이 쏟아져 내릴 것 같아요. 티베트에는 위로 끌어당기는 반대의 인력이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땅이 끌어당기지요. 양 극단 같은 느낌이에요. 그래서 인도에서 티베트에 가면 물방개처럼 늪에서 공중으로 날아오른 듯한, 두 개의 영역을 날아다니는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인도나 티베트에 있을 때는 벌레에 대해 의식하지 못했어요. 오히려 일본에 돌아와서 내가 벌레였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P 62)
한마디로 말하자면 어둠이지요. 사물이 보이는 건 빛과 그늘이 있기 때문이라고들 하는데, 그건 얄팍한 생각입니다. 빛도 그늘도 사라지고 어둠의 상태에 가까울 때 찍어야 가장 존재감 있는 사진을 얻을 수 있습니다. (P 77)
- 후지와라 신야 (이윤정 옮김). 여행기. 인도방랑. 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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