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지털기2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3)

이문형 2014. 4. 13. 00:10

<봉지털기 248-3>

제주가 가진 천혜의 아름다움이 빚는 서정적 풍경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서정적 풍경이 우리가 빚은 서사적 풍경을 더할 때, 그때에 만 그 속에 사는 우리들은 존엄할 수 있을 게다. 그를 성찰적 풍경이라 한다. (P 235)

 

우화루 누대에 올라 바깥과 영산암 마당 사이의 경계에 걸터앉아 쏟아지는 햇살 속에 몸을 맡기면, 나는 사바세계와 극락의 경계에서 그 불안정하고 불확정적인 우리네 삶을 관조하고 있다는 것을 이윽고 깨닫게 된다. 그것은 축복이며 신비이다.

침묵과 고요는 이 건축을 지배하는 언어이며 비움은 그 형태였다. 그 깊이와 맑기...... 불가해한 비움, 어쩌면 완벽하지 못하여, 아니 완벽은 비움이 아니라며 의도적으로 완벽을 버린 까닭에 얻은 자유함이다. (P 255)

 

수도사는 세 가지 자유를 얻어야 이루어지는 삶이라고 한다. 첫째는 물질로부터 자유여서 모든 세상사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 둘째는 육체로부터 자유이다. 가족과의 이별은 물론 욕정으로부터도 떠나야 한다. 셋째는 정신의 자유인데 가장 어려운 과제이다. 모든 번뇌와 욕심을 완벽하게 버리고 신 앞에 엎드릴 수 있어야 한다. 청빈과 동정과 순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자유이니, 그들의 맑은 삶이 그런 아름다운 공간과 묵시적 건축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기꺼이 고독으로 몰아넣고 수도하는 그들과 그런 수도원은 그래서 늘 경외의 대상이었다. (P 264)

 

리얼리즘 철학자 루카치는 "미적 효과의 한 목표로서 환상은 예술을 백일몽 차원으로 떨어뜨리는 하나의 기만이며 사기"라고 주장한다. 좀 더 인용하면 "감정이입을 예술적 체험의 핵심으로 삼는 것은 예술적 체험을 일상적 삶의 차원으로 격하시킨다는 의미이며, 니체의'디오니소스적 도취'는 감정이입적 반응의 극단적 형태이고, 초월이란 자신의 균열되고 불구적인 인격의 무가치성이요, 세계와 그들의 관계의 공허성이다. 위장된 오만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를 기만할 따름"이라 했다. 선동과 구호와 선전을 위한 건축들의 목적이 '도취'에 있을진대, 건축의 본질이 도취라면 루카치의 이론에서 이는 마약 중독이나 알코올 중독의 효과만큼 인간을 비인간화시킨다. 이것은 비윤리적이다. (P 271)

 

독일 함부르크 남쪽 외곽에 '하르부르크'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원래 하노비 공국의 도시였으나 20세기 초에 함부르크에 편입되었으며, 지금은 인구 20만 명 정도의 주거와 연구 기능이 높은 위성도시이다. 1986년 이 도시의 중심부 번잡한 길가 한 귀퉁이에 12미터 높이의 탑이 세워졌다. 이 탑은 하르부르크 시 정부가 파시즘의 아픈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로, 공모를 통해 조각가 요한 게르츠와 에스터 샐레브 게르츠의 공동작을 선정한 바 있다.

이 부부 작가가 제출한 안은 1미터 사방에 12미터 높이의 단순한 입방체였지만, 이 평범하게 보이는 탑은 놀랍게도 매년 2미터씩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도록 되어 결국에는 모두가 사라지는 안이었다. 사라지는 기념탑. (중략)

"우리는 하르부르크 시민들과 이 도시를 방문하시는 분들에게 이 탑에 이름을 써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많은 이름들이 이 12미터의 탑에 담기게 되면서 이 탑은 땅 속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어느 날 이 탑은 완전히 사라지고, 파시스트에 대한 저항을 기념하기 위한 이 탑이 놓인 장소는 비어 있게 될 것입니다. 불의에 대항하여 일어서야 하는 것은, 결국에는 우리 스스로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중략)

1993년 11월 10일 완벽히 땅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조그만 광장에는 1미터 사각의 흔적만이 남아 그 탑이 존재했음을 기억하게 했다. (P 274)

 

 - 승효상. 에세이.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컬처그라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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