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지털기 248-2>
노벨 문학상을 받은 주제 사라마구는 기자 에게 "누구로부터 배우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자 자기가 쓴 소설로부터 배운다고 답했다. 그렇다. 나도 이제는 내가 지은 건축으로부터 배우고 배운다. 그러나 그보다도 내게 더 큰 가르침을 주는 것은 나의 일상이다. 성서의 로마서 12장 2절에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진리가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라'고 쓰여 있다. 마음이 새로우면 아무리 하찮은 것도 새롭게 보여 배운다. 그리니 우리의 일상은 너무도 신비스럽다. (P 85)
도무지 길 같지 않은 길이며 보이지 않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야생의 풀들과 꽃들에게 위안을 받으며 한 구비를 돌면 드디어 저 멀리 천왕문이 있다. 맞았다. 비록 보이지 않는 길을 걸었지만 나는 내 마음의 길을 걸었구나.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하며 천왕문을 들어선다. 그런데 이 애처롭게 아름다운 길(때로는 돌계단으로, 때로는 흙으로, 들풀로 혹은 징검돌로 이루어져 끊일 듯 보일 듯한 이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길은 여느 절의 길처럼 대웅전을 향해 있는 게 아니라, 대웅전을 오른편으로 비키고 그 뒤의 나한전도 비키고 연이어 있는 용화전과 산신각마저도 비켜서 저 멀리 비슬산 중으로 올라가는 듯하다가 끝내는 아스라하게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나는 산신각 곁에 서서 감동하고 말았다. 그래, 절로 가는 아름다운 마음이 기껏 대웅전을 참배하는 것으로 끝난다 해서야 세속의 길과 어찌 다를 바가 있을 것인가. 종교의 목표가 우리의 삶에 대한 성찰이라면, 절로 가는 길은 그 종점이 있을 수 없는 게다. 여태 나는 보이는 길만 걸었고 목적지를 가져야만 걷지 않았을까. (P 138)
김수근 선생은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길을 다시 구부리고 좁게 만들고 어둡게 하면 어떤가. 유가사의 길처럼 보이지 않는 길도 만들고 샤르트르의 미로처럼 지혜를 찾는 길도 만들자. 아니면 잃어버린 옛길을 찾아내도 좋다. 그래서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이 뿌리내려 기억을 만들고 이야기를 쓰며 이웃을 잇게 하자. 그게 우리가 바르게 정주하는 방법이며 잃어버렸던 우리를 다시 찾는 길일 것이다. (P 145)
부석사의 미적 가치는 무량수전의 시각적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는다. 무량수전에 안치된 불상은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가지고 서방극락을 주제하는 아미타불인데, 그 좌정한 방향이 남향이 아니라 동쪽의 사바세계를 향하고 있다. 따라서 석가모니불을 의미하는 삼층석탑은 마당에 놓여 있지 않고 동쪽에 놓여 있으며, 마당에는 석등이 놓여 세계를 밝힌다. 절묘한 것은 이 석등의 위치가 무량수전의 정중앙에 놓인 게 아니라 다소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안양문을 지나서 오른 이들을 자연스레 동쪽으로 향하게 하여 무량수전의 동쪽 출입문을 통해 들어오게 함으로써 아미타불과 자연스레 정면으로 대면하게 하는 놀라운 공간 연결을 만든다.
뿐만 아니라 부석사의 배치를 이루는 축은 두 개가 있는데 이 축을 이룬 방식이 놀랍다. 천왕문과 범종각이 이루는 축과 안양문과 무량수전이 이루는 축이 약 30도의 각으로 틀어져 있다. 이 축의 향을 보면 무량수전-안양문의 축은 바로 앞의 낮은 봉우리를 안산으로 하여 작은 영역을 이루지만, 범종각-천왕문의 축은 태백산에서 내려와 소백산을 지나고 죽령을 이어 뻗은 도솔봉으로 향하고 있어 그 영역이 대단히 광대하다. 혹자는 도솔천으로 향하는 축은 미륵정토를 지향하며 안산의 축은 미타정토를 의미한다고 하여 불교의 다른 두 이념이 여기서 같이 나타나 있다고 한다. (P 193)
그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달동네의 공간 구조가 산토리니 마을의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달동네들은 도시 시설이 미비하고 낙후되었으며 재해에 노출되어 있어 재정비해야 마땅하지만, 시간의 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그 공간 구조만큼은 관광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늘 말끔하게 단장하는 산토리니보다 훨씬 진정성이 있었다. 산토리니를 나오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었다.
그러나 그 후 불과 10년 사이에 우리의 달동네는 거의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P 222)
- 승효상. 에세이.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컬처그라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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