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지털기 239-5>
서양 사상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3천 년 전에 이오니아 제도에서 태어난 이래, 서로 상반되는 듯이 보이는 두 개의 입장으로 양분되어왔다. 이 중 한쪽에 따르면, 우주의 진정하고 궁극적인 실재는 전혀 변하는 일이 없는, 본질적으로 불변적인 형상들 속에 있다. 반대로 다른 한쪽에 따르면, 우주의 유일한 실재는 운동과 진화 속에 존재한다.…중략…
과학은 진화를 연구한다. 그것이 우주 전체의 진화이든 혹은 우주 속에 들어 있는 어떤 체계들 - 이를테면 인간을 포함한 생명권 -의 진화이든 상관없이, 과학은 진화를 연구하는 것이다. 일체의 현상, 일체의 사건, 일체의 인식은 어떤 상호작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모든 것은 (그 상호작용적 성격으로 인해) 체계의 구성요소들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기 마련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우주의 구조 속에는 불변적인 것들이 존재한다는 생각과 결코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현상들을 분석하는데 과학이 구사하는 기본적인 전략은 불변적인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모든 물리적인 법칙들은, 모든 수학적 전개와 마찬가지로, 어떤 불변적인 관계를 규정한다. 과학의 가장 근본적인 명제들은 ‘불변적으로 보존되는 어떤 것’이 있음을 상정하는 보편적인 공리들이다. 어떤 현상이든, 그 현상에 의해 보존되는 불변적인 어떤 것에 의해서 그 현상을 분석할 수 있을 뿐이지, 그 밖의 다른 방식에 의해서 그 현상을 분석하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떠한 실례를 선택하든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P 147)
저마다 독특한 현상들의 무한한 다양성 속에서 과학은 오직 불변적인 것만을 추구할 뿐이다. (P 148)
남조류와 적충류, 문어와 인간, 이들 사이에 어떠한 공통점이 있겠는가? 하지만 세포를 발견하고 그것에 대한 이론을 세움으로써, 다시 한 번 이들 다양성 아래에서 새로운 통일성(단일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생명계 전체의 이와 같은 미시적 차원에서의 깊고 엄밀한 통일성(단일성)을 완전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주로 20세기 2/4분기에 일어났던 생화학의 발전을 기다려야 했다. 오늘날 우리는 박테리아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그 화학적 기계장치는 그 구조나 기능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P 150)
생명체들의 구성요소가 화학적으로 모두 동일하고 또한 그것들이 모두 동일한 경로에 의해 합성된다면, 생명체들이 보여주는 놀랄 만한 형태학적 · 생리학적 다양성의 근원은 무엇일까? 게다가 어떻게 해서 각각의 종은, 자기 이외의 다른 종들과 동일한 재료, 동일한 화학적 반응을 사용하면서도, 그 자신의 특유한 구조적 규범 - 그 자신을 다른 종들로부터 구별되도록 특정 짓는 이 구조적 규범 - 을 세대를 거듭하여도 변함없이 불변적으로 유지되게 하는 것일까?
오늘날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다. 모든 생명체들의 보편적인 구성요소인 뉴클레오티드와 아미노산을 논리적으로 일종의 알파벳과 같다. 이들 속에 생명체의 구조, 즉 그 특이적인 결합기능이 적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권에 존재하는 모든 다양한 구조와 기능은 전부 이들 알파벳으로 적혀 있다. DNA 속 뉴클레오티드들의 연쇄로 적혀있는 텍스트가 각 세포 세대마다 불변적으로 복제됨으로써, 종의 불변성이 보장되는 것이다. (P 152)
기본적인 생물학적 불변 요소는DNA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멘델이 유전자를 유전적 특징을 자손에게 불변적으로 운반하는 운반자로서 정의한 것과 에이버리에 의해서 DNA가 유전자의 본체임이 화학적으로 확인된 것, 또한 왓슨과 크릭이 이 유전자의 복제적 불변성의 구조적 기초를 밝혀낸 것, 이 세 가지는 어떠한 의문의 여지도 없이 생물학에서 이제까지 이뤄져온 가장 근본적인 발견들에 해당한다. 여기에다 ‘진화에 대한 자연선택론’도 덧붙여야 할 것이다. 이 자연선택론이 함축하는 모든 의미와 모든 확실성이 제대로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저 세 발견 덕분이다.
DNA 구조가 어떠하며, 어떻게 이러한 구조가 유전자의 뉴클레오티드 배열이 정확하게 복제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며, DNA상의 뉴클레오티드 배열을 특정 단백질의 아미노산 배열로 번역하는 화학적 장치는 어떤 것인가 등, 이 모든 문제와 관련된 사실과 생각들은 이제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그리고 훌륭하게 알려져 있다. (P 153)
- 자크 모노 (조현수 옮김). 철학. 우연과 필연.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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