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2

얼룩진 벽지 / 성명남

이문형 2012. 1. 7. 02:02

            얼룩진 벽지  /  성명남

 

 

독거노인이 사는 벽 귀퉁이에

어린 재규어 한 마리 숨어 산다

우거진 풀숲 사이로 자세를 낮춘

짐승의 매화무늬가 보인 건

열대우림 같은 우기가 시작된 며칠 뒤였다

지직거리는 TV속 동물의 왕국에선

재규어가 강물 속에 꼬리를 담그고

살랑살랑 흔들어 물고기를 잡는다

노인은 자신의 퇴화된 꼬리를 자꾸 만져보다

돌아누우며 TV를 꺼버렸다

그칠 줄 모르고 비가 내렸다

하루가 다르게 짐승의 영역은 확대 되어갔다

영역을 표시하는 그 채취만으로

목덜미를 물린 듯 노인은 불안에 사로잡혔다

짐승이 다 자랐을 때 닥칠지도 모를

치명적 위험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이다

점점 몸집을 불린 수컷 재규어가

몸이 근질거릴 때마다 혀로 제 몸을 핥는다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기세다

범람한 강물이 골목을 덮쳤을 때

노인의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맹수가 펄쩍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평원을 가로질러 노인을 물고 사라졌다

도배장이가 벽지를 쫙 뜯어내자

그 속에 무성한 열대밀림이 펼쳐졌다

 

- 2012 국제신문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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