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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自說
“시인은 무당과 같아.”
오랜 만에 만나 나의 시집을 건네주자 문우 ㅅ은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을 큰 거부감 없이 들었고, 스스럼없이 헤어졌는데 이 말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거부감 없이 들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죽음, 무생물의 생물화, 종교적인 문제 등 이러한 것들이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주고, 힘을 준다.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매슈 허트슨은 미신은 우리를 행복하고 건강하게 해주는 비합리적인 믿음이라고 한다. 오히려 인간의 진화에 큰 도움이 된 대표적 사고방식이다.
선정에 들면 모든 경계가 한순간에 사라진다. 밝음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다. 시간도 공간도 아니다. 물질도 정신도 아니다. 존재도 그 아닌 것도 아니다. 고통이나 편안함도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것들 너머에 있는 무엇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 스스로 깨어있음을 안다.
공이 공이 아닌 것이다.
빅뱅에 얼마나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가가 미래의 첨단세상이 된다. 미국, 영국, 이탈리아가 600km상공에 설치한 스위프트 우주망원경으로 2009년에 관찰한 ‘GRB 090429B’라는 별은 지구로부터 무려 131억 4000만 광년이나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한다. 우주가 탄생하고 5억 2000만년이 지난 순간에 번쩍였던 별빛이 이제야 도달한 것이라고 한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북극성의 별빛은 434년 전의 것이라고 한다. 과거를 바라보면서 존재하는 현실은 화석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이것은 詩에 어떻게 녹아드는 것일까?
― 이문형, 自說 중에서
■ 저자 약력
이문형 시인
1983년 《현대시조》 전국시조지상백일장 당선
2000년 《불교문예》로 시작활동
시집 『바람 그리지』 『어머니 佛』이 있음
현 《시조매거진》 발행인
■ 차례
제1부 스스로 찾아들고 싶었던 신운神韻의 길
당신의 오늘
상자 접기
천불천탑
연등
콩밭의 풍경소리
아카시 숲
감자 반데기
세한도
그림자 사랑
화살나무
연어를 꿈꾸다
독도법
휴휴암
명사산
부석사
산철쭉
별이 빛나는 밤
장승
걸인 선에 들다
몽마르뜨르 언덕
사랑 그 독에 대하여
해넘이
제2부 아직 달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
사랑이란
증언
사랑앓이4
가사어
가리봉에 내리는 비
칠성 좌판대
오래된 상처
꽃진 그 자리
나비야 나비야
불 2008 숭례문
톤레샤프호에서
나는 새는 뿌리에 둥지를 틀지 않는다
금식
충돌
둥근 열매
숯불
억새꽃
금식
칡꽃 피다
다시 경계에 서서
마나나
티베트 버섯
산불
비차
제3부 핏빛 노을로도 가슴이 재가 되네
돌탑
풍제
CCTV
차마고도
역마살
황태
밤기차
서산마애삼존불
마애미륵
밤의 이중주
개펄
고비
반딧불이
끽다거
산 2
간월도
■ 自說 : 巫와 空과 별과 詩
■ 시집 속의 시
당신의 오늘
모든 것은 멀어질수록 과거가 된다
우주색 밤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 너무 멀다
오늘 붉은 보름달이지만
지금 바라보는 저 달이 과거인 것은
달에다 발을 단단히 걸어두지 않았기 때문
빛을 거슬러 오른 죄,
거슬러 오른 만큼 시간이 지워지는 병을 얻어
병상에 누우신 어머니
살갑던 막내부터 육남매를 차례로 지우고
의처증인 아버지도 깔끔하게 지워버리고
꿈 많은 처녀로 살고 계신다
누워계신 어머니의 눈빛에서
가끔 푸른 동해가 일렁이는걸 보면
그때도 많은 날을 장생포 언덕에서
고래 떼를 기다리고 계셨나 보다
어머니는 오늘
반구대에 초상화만 걸어두고 떠난
만경창파 너머 귀신고래에게 다가가고 계셨다
빙하가 풀어내는 천 년 전의 시간 속에서
지금 유영 중인 귀신고래
문득 나의 멀어진 화석*을 찾아가고 싶었다
*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또한 화석이기도 하다.
- 자크 모노 (우연과 필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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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무지게 마감한 감귤상자
옆구리엔 손잡이용 구멍이
각 모서리마다 작은 숨구멍이 뚫려있다
제 몸을 갈고리로 단단하게 여민 뚜껑
속은 비었지만
서로 마주보며 엇갈리게 어깨를 잡기만 해도
한 번 더 안으로 자신을 꺾어 등을 대기만해도
한걸음 물러나 접지만 잘해도
견고한 골조로 외압의 하중을 견딜 수 있다
눌리고 꺾이고 뚫리고 끼이고 잘리면서
세상을 여전히 굴곡지게 달려가야 하지만
과일을 과일이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비우고
누군가를 온전히 담고 갈 수 있다는 것은
삶이 다시 가득 채워지고 향기 나는 일
쫙 펼쳐보면 시작은 그저 편평한 한 장의 마분지이지만
연등
개흙 속을 속속들이 뒹굴어봐야
뿌리 하나 뻗을 자리 알 수 있다는데
세상사는 의미도
백팔번뇌를 거쳐봐야 겨우 눈뜬다는데
사랑도 사랑 나름
이속저속 다 태워봐야
겨우 앞 가름할 수 있는 등 하나로
내걸릴 수 있다는데
연등으로 세상에 내걸린다는 거
근원으로부터 영혼 하나 쑥 올라와 연꽃 피운
그 꽃술에 심지 꽂아
줄기에서 연엽으로 연근까지 내려가며
하나하나 등불 켜는 일
개흙 속을 뒹굴던 잔뿌리 그 아래로 내려가며
자괴를 모두 파헤치는 일
견뎌온 삶을 처절하게 밝혀
원죄까지 확연히 들추어내는 일
연등으로 세상에 내걸린다는 거
자빈지 안식인지 그리움인지도 모를
작은 떨림이라도 혹, 찾아보는 일
나를 사르고 살러 빛으로
세상 건너는 일
콩밭에 풍경소리
햇빛 휘어진
철지난 콩밭에 들면
풍경소리 들린다
숨이 다한
꼬투리 속에서
씨앗은 씨앗이고자
스스로 추錘가 되어
전신을 두드리는 소리
겨울철산을 넘겠다고
마음 다잡는 예종豫鐘
그 소리에
흙빛 꼬투리가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는 땅을 향해
가슴을 빠개 젖히며
푸른 씨앗을 날린다
우리네 삶의 저 바깥까지
울려야 종소리다
황태
겨울 산에 들면
속 썩을 일 없겠다
바다를 잃은 죄로
얼녹는 놀빛 풍상
하늘이
눈 감을수록
목어소리 더 깊다
■ 펴낸곳 불교문예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