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명강 (3)
<봉지털기 246-3>
지금 우리 사회가 워낙 힘들기 때문에 수많은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위로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영혼의 당뇨병 시대'라 그랬습니다. "하도 설탕을 많이 투여해서, 위로를 너무 해 줘서 지금 당뇨병에 걸리게 생겼다. 설탕을 줄이고 식사도 줄이고 몸으로 근력을 키워야 하는데 계속 설탕만 주입하면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P 133)
공자에게는 '네 가지'가 없었습니다. 이를 "자절사"라 합니다.
네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의'입니다. 사족인 욕망이나 트라우마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필'입니다. 의지로 미친듯이 돌진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세 번째는 '고'입니다. 반복되는 경향이나 패턴이 없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아' 즉 자아나 성격이 없었습니다. (P 136)
비자각의 결과로 일어나는 왜곡의 메커니즘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굳어진다는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가 살아왔던 세상, 자기 경험체계 안에서 자기 의지, 자기 방어 속에서 계속 점점 더 경화되어 가는 것이지요. 그 정도가 심한 사람을 우리는 속된 말로 '꼰대'라 부릅니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들을 보편적인 가치로 여겨 이웃과 자식들에게 강요하는 막힌 사람을 그런 이름으로 부릅니다. (P 138)
"외물의 영향을 받지 마라!" 타인에게 너무 영향을 받지 말라는 의미인데 이게 관건입니다. 우리는 늘 타인의 의견에 추동되고, 그래서 자신이 아닌 남의 인생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라캉이라는 정신분석학자는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마음을 수련한다는 것은 외부적 자극을 통제하는 기술에서 출발합니다.
그 첫 번째 요건은 참는 겁니다. 불교에서 인생은 사바세계, 즉 "참고 견뎌야 할 세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두 번째는 타인을 이해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화나게 만들면 그가 살아온 환경, 그가 그런 반응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계기를 떠올리면 화가 훨씬 덜 납니다. 세 번째는 그보다 차원이 높은 건데, "세상에는 일어날 일만 일어난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재앙과 수많은 일들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불교에서는 '연기법'이라고 합니다. (P 142)
우리는 일상의 숩관에 갇혀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언어의 덫에도 갇혀 있습니다. 언어가 삶을 지시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언어와 우리는 단절될 필요가 있습니다. 스님들이 절간으로 산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완전한 단절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함입니다.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언어로 읽고 쓰고 생각하는 법을 익히는 일이기도 합니다. (P 146)
맹자는 벼슬에는 천작(天爵)과 인작(人爵)이 있는데, 인작이 아닌 천작이 귀한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천작이 있으며 인작이 있으니, 인의와 충신을 행하고 선을 즐거워하며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천작이고, 공경과 대부는 인작이다.
천작은 인의와 도덕을 행하고 선을 좋아해서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자연적으로 존귀해지는 것이고 인작은 공이니 경이니 대부니 하는 벼슬을 남에게 받는 것입니다. 공은 우리나라로 따지면 삼정승이고 경은 육조판서고, 그 아래가 대부입니다. (중략)
인작은 남이 주어서 귀해진 것이니까 그 사람이 빼앗아 가면 끝이라는 얘기입니다. (P 191)
- 강신주 외 14. 동양고전. 인문학 명강. 21세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