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방랑 (2)
<봉지털기 240-2>
고독한 여행 중에 프라이드를 잃는 것은 죽음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곧장 숙소로 돌아가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다시 갠지스 강가로 나왔다. 그리고 정신없이 강물 속을 헤엄쳐 돌아다녔다. (P 124)
기원전 326년 어느 기분 좋은 봄날, 인류의 대부분을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이 인더스 평원에서 그의 대군과 함께 쉬고 있을 때, 주위에 아랑곳없이 벌거벗고 앉아 햇볕을 쬐고 있는 성자 무리가 눈길을 끌었다. 이 위대한 정복자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젊고 유능한 부하 오네시크리투스에게 그들이 누군지 알아보라고 명했다.
“우리에 대한 지식을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하려는 것은 진흙땅에 물을 흘려놓고 그것이 깨끗하길 바라는 것과 같다네. 만약 당신의 주인이 우리가 누군지 알고 싶다면 먼저 입고 있는 옷을 벗어버리고 겸허하게 우리에게 와서 함께 햇볕 아래 앉아야 해.”
성자들은 오네시크리투스에게 그렇게 대답했다.
사두에게는 버스 운전사도 알렉산더도 다른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또한 그들은 인도 문명의 발상기부터 존재해오면서도 인도 사회를 구성하는 카스트 제도에 대해 지극히 무관심하다. 그것은 불가촉천민과 함께 그들이 또 하나의 아웃카스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P 146)
죽은 자와 여자에게는 왜 꽃이 잘 어울리는 것일까. (P 199)
인도에서 나는 힌두교라는 말을 살아 있는 사람의 입에서 들은 적이 없다. 힌두교라는 말을 인도인이 입 밖에 내지 않는 한, 힌두교는 인도인 안에 살아 있을 것이다.
힌두교에 성전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인데, 이를테면 시바나 크리슈나 같은 신들의 일화는 우리에게 힌두교가 아니다. 적어도 그것은 20세기 세기말에 살아 있을 만한 힌두교가 아니다. 20세기의 힌두교는 완전한 아나키다. 암모나이트 화석의 무게, 그 자체의 사실과 다름없을 만큼 아나키적이다. 그래서 금세기 말, 힌두교라는 말은 이미 죽었다. 그리고 이 무서운 종교는 우리 안에서 최대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황무지에서 자라난 도덕이고, 자연이 부여하는 도덕에 대한 사실이며, 사실에 대한 허용이다. 그들의 방식은 정리된 인간의 언어 나부랭이를 믿기보다는 언제나 모순을 토해내는 물체의 무게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언제나 혼돈으로 가득하기는 해도 대단히 온전하다. (P 264)
좋은 것을 신앙하기 시작한 조금 머리가 큰 돼지, 즉 프랑스에서 온 어느 히피는 라자스탄 지방의 한 지방신을 모신 신전에 들어가려다 신관에게 제지당했다. 히피는 화를 냈다.
“나는 신을 보고 싶을 뿐이오. 어찌 신이 일부 사람들만을 위해 있단 말이오?”
그러자 신관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이렇게 말했다.
“이 신전에 있는 신의 모습은 이 근방 주민들의 삶을 위해 있다네. 만약 자네가 진정으로 신을 보고 싶다면 신은 어디에나 있어. 나무에도 있고 바위에도 있고 강에도 산에도 길가에 굴러다니는 잔돌에도 있지. 자네 눈 속에도 있고 자네 눈에 비친 세상 모든 것 속에도 있단 말일세.”
다행히 그 돼지는 영리했으니. 나는 그가 자신의 눈에 비친 세상 모든 것 속으로 투덜대며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P 266)
- 후지와라 신야 (이윤정 옮김). 여행기. 인도방랑. 작가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