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필연 (10)
<봉지털기 239-10>
유대-기독교는 모든 위대한 종교들 중에서 아마도 그 역사주의적인 구조상 가장 ‘원시적인’ 종교일 것이다. 이 종교는 어떤 베두인 부족의 행적에 직접적으로 천착하고 있으며, 그 내용이 어떤 신적인 예언자에 의해 더욱 풍부해지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다. 반면 불교는 가장 고도로 분화된 종교로서, 그 원래적인 형태에 있어서 오직 카르마(業)에만, 즉 개인의 운명을 지배하는 초월적 법칙에만 천착하고 있다. 카르마란 인간의 역사(이야기)라기보다는 차라리 영혼의 역사(이야기)에 가깝다. (P 239)
현대사회는 과학 위에 구축되어 있다. 현대 사회가 갖는 풍요로움과 힘, 그리고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더 큰 내일의 풍요로움과 힘에 인간이 접근할 수 있다는 확신은 모두 과학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또한, 어떤 동물종이 내린 최초의 ‘선택’이 그 자손 전체가 진화해나가는 미래의 방향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기원에 있어서 무의식적이었던 ‘과학적 실천’의 선택은 인류 문화의 진화로 하여금 되돌아올 수 없는 일방통행의 길로 접어들게 하였다. 19세기의 과학적 진보주의는 이 길이 틀림없이 인간성의 경이적인 개화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반면, 오늘날 우리는 우리 앞에 암흑의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음을 본다.
현대사회는 과학이 가져다준 물질적 풍요와 힘을 받아들였다. 그리나 과학이 주는 가장 심오한 메시지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실상 거의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진리를 찾기 위한 새롭고 유일한 원천에 대한 규정, 윤리의 기초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의 요구, 물활론적 전통과의 단적인 결별에의 요구, ‘옛날의 결속’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 자리를 새로운 어떤 것으로 대신할 필요성의 제기 등등의 것을 말이다. 과학이 주는 모든 힘으로 무장하고 또한 그것이 주는 모든 물질적 풍요를 향유하면서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바로 이러한 과학에 의해 이미 그 뿌리까지 괴멸된 가치 체계에 따라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 이전에 있었던 어떤 사회도 이와 같은 분열을 알지 못했다. 원시 사회나 고대 사회는 물활론적 전통 위에 지식의 원천과 가치의 원천이 하나의 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역사상 최초로 우리 사회에 접어들어, 문명은 자신을 건축하기 위해 지식의 (즉 진리의) 원천으로서는 물활론적인 전통을 완전히 포기하면서도 가치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이 전통에 절망적으로 매달리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서구의 ‘자유주의’ 사회들은 그들의 도덕의 기반을 유대-기독교적 종교성과 과학적 진보주의가 서로 어울리지 않게 뒤섞인, 또한 인간의 ‘자연적’ 권리에 대한 믿음과 공리주의적 실용주의가 서로 어울리지 않게 뒤섞인 역겨운 짬뽕 위에 두려하고 있는 반면, 마르크스주의 사회는 언제나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이고 변증법적인 종교를 설파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마르크스주의 사회의 도덕적 뼈대는 자유주의 사회의 그것보다 훨씬 더 튼튼해 보이지만, 이제까지 그것의 힘이 되어왔던 이러한 강고함으로 인해 지금은 더욱 커다란 취약함을 껴안게 되었다. 여하간 물활론에 뿌리내리고 있는 이 모든 체계들은 모두 객관적 지식의 영역 밖에 곧 진리의 영역 밖에 있으며, 과학과 무연하며, 결정적으로는 과학에 적대적이다. 물론 이들 체계들은 과학(과학적 지식)을 이용하려 하겠지만, 과을 존중하거나 그것에 봉사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둘 사이에 벌어진 틈은 너무나 커다랗고, 마치 이러한 틈이 존재하지 않는 양 보지 않으려 드는 허위도 너무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것이기에, 약간의 문화적 소양과 어느 정도의 지성을 갖춘 이들 - 그리하여 이러한 위기상황에 대한 정신적 번민에 시달리며 살면서 바로 이러한 번민을 그들의 모든 창조의 원천으로 삼게 된 이들 -은 이로부터 그들의 양심을 짖어놓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었다. 즉 사람들 중에서 우리의 사회와 문화의 진화를 책임질 자리에 있는 바로 그들이 말이다.
현대인의 도덕적(정신적) · 사회적 존재의 근저에 있는 이 허위가 바로 현대인이 겪는 영혼의 질환이다. 현대인은 자신이 이러한 영혼의 질환을 겪고 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다소간 자각하고 있기에, 오늘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 문화에 대해 증오 내지는 두려움의 감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좌우지감 그것은 소외의 감정이다. 과학에 대한 염오의 감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흔히는 과학의 기술적 응용의 부산물들에 대허서다. 원자폭탄, 자연파괴, 인구증가 같은 것들 망이다. 이런 문제들을 겨냥하는 비판의 목소리들에 대해, 과학 자체는 그것의 기술적 응용과는 다른 것이라고, 원자력의 사용은 조만간 인류의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리라고, 자연 환경의 파괴는 테크놀로지의 과잉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아직까지 불충분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인구릐 폭발적 증가는 해마다 수백만의 아이들이 죽음으로부터 구제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데 그렇다면 그 아이들을 다시 죽게 내버려 두어야 하느냐고 대꾸하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질환을 가져온 깊은 원인과 그 표면적인 징후를 혼동하는, 한갓 수박 겉핥기식의 피상적 논의일 뿐이다. 사람들의 거부감은 실은 과학의 본질적인 메시지 자체를 행해 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신성 모독, 즉 가치에 대한 파괴다. (P 244)
과학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그 완전한 의미에서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은 마침내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온 자신의 오랜 꿈에서 깨어나 자신의 완전한 고독을, 자기 존재의 근본적인 이상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이 마치 집시처럼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주는 그의 음악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그가 꿈꾸는 희망에도, 그가 겪는 고통이나 그가 저지르는 범죄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무관심해 할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누가 죄를 규정할 것인가? 누가 선과 악에 대해 말할 것인가? 전통적인 체계들은 하나같이 윤리와 가치를 인간의 힘이 미치는 영역 너머에 두었다. 가치는 인간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위에 군림하는 것, 따라서 인간이 가치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침내 인간은 가치란 인간 자신에게만 속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처럼 인간 스스로가 이제 가치의 주인이 되자, 모든 가치들이 우주의 무정한 공허 속으로 해체되어 사라지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제 인간은 마침내 과학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아니 차라리 과학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었다고 말해야 하리라. 이제 인간은 자신의 신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파괴하는 과학의 끔직한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된 것이다. (P 245)
진정성이라는 개념이 윤리와 지식이 서로 만나는 공동 영역이 된다. 이 공동 영역에서 가치와 진리는, 서로 결부되면서도 결코 서로 뒤섞이는 일은 없으므로, 그들 사이의 상호공명을 깨달을 수 있는 주의 깊은 사람에게 그들 각자의 완전한 의미를 드러내게 된다. 반면 진정하지(참도지) 못한 담론은 저 두 개의 범주를 서로 뒤섞어 혼합하는 것으로서, 비록 의식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가장 해로운 무의미와 가장 범죄적인 허위에 이르게 된다. (P 249)
- 자크 모노 (조현수 옮김). 철학. 우연과 필연. 궁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