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필연 (8)
<봉지털기 239-8>
초기 언어습득이 후성적 발생 과정과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은 해부학적 자료들에 의해 확증된다. 실제로 뇌의 성숙은 출생 이후 계속 진행되다가 사춘기와 더불어 끝난다. 이러한 뇌의 발달은 본질적으로 피질 신경세포(뉴런)들의 상호연결이 현저히 풍부해지면서 이뤄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은 출생 후 첫 두 해 동안 대단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다가 그 이후로는 점점 더 느려진다. 이 과정은 사춘기 이후로는 계속 진행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 과정이 이뤄지는 시기가 초기 언어습득이 가능한 ‘임계시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P 192)
우리가 연구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세포들조차도 ‘원시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조차도 5천억 내지 1조 세대를 넘는 자연선택을 통해서 아주 강력한 합목적적 장치가 점차적으로 축적되어 이뤄진 산물이기 때문에, 이들에게서 정말로 원시적인 구조의 잔흔을 알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화석이 없는 상태에서 이러한 진화가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재구성해내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진화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그 출발점에 대해서는 그럴듯한 가설이나마 제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P 201)
유전암호란 번역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오늘날의 세포 번역 기계는 대략 150개의 고분자 성분을 포함하는데, 이들 성분들 자체가 DNA 속에 암호화되어 있다. 즉 암호의 번역에 의해 만들어지는 산물에 의해서만 암호가 번역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알로부터 나온다. 라는 말의 현대판 표현이다. 언제 또한 어떻게 이 고리가 이처럼 자기 순환적(자기 완결적)으로 채워지게 된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유전암호를 해독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알기에 최소한 문제를 정확한 방식으로 제기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 단순하게 말한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 하나다.
a) 유전암호의 구조는 화학적 이유에 의해, 혹은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입체화학적 이유에 의해 설명된다. 어떤 하나의 암호가 어떤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시하도록 ‘선택된’ 것은 이 둘 사이에 모종의 입체화학적 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b) 유전암호의 구조는 화학적으로 보자면 자의적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의 유전암호는 일련의 우연적 선택들의 결과로서, 이러한 선택들이 유전암호의 구조를 조금씩 점진적으로 풍부하게 만들어온 것이다. (P 202)
고양이에게 행해진 몇몇 실험들은, 스펙트럼상의 모든 색들을 동시에 반사하는 장은 흰 표면처럼 보이지만 흰색이란 주관적으로는 그 어떤 색도 부재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미스터리한 사실에 대해 해석할 수 있도록 해준다. 각자 서로 다른 파장에 반응하는 뉴런들 사이에는 교차 저해가 일어나며, 이로 인해 망막이 서로 다른 파장을 가진 모든 가시광선들에 한꺼번에 노출될 때에는 이들 뉴런들이 아무런 신호도 보내지 않는다는 것을 실험자들이 보여준 것이다. (P 213)
모든 과학자들은 그들의 반성적 사색이 그 가장 깊은 차원에 있어서는 결코 언어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의식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장 깊은 차원에서 이뤄지는 사색은 어떤 상상적 체험이다. 즉 시각적인 의미에서의 ‘이미지’로 간신히 나타날 듯 말 듯한 어떤 형태들이나 힘, 상호작용들의 도움을 받아 시뮬레이트되는 체험인 것이다. 나는 언젠가 상상적 체험에 깊이 몰두한 나머지 다른 모든 것이 의식의 장에서 사라져버린 채 나 자신이 하나의 단백질 분자가 된 것 같은 경험을 하고 깜짝 올란 적이 있다. 하지만 바로 이 체험의 순간에서가 아니라 이 체험이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이 시뮬레이트된 체험의 의미는 나타난다. 시뮬레이션 체험에서 경험되는 비시각적 이미지들을 어떤 상징들로서 간주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히 말한다면, 나는 그것들을 상상적인 체험에 직접 주어진, 주관화되고 추상화된 ‘실재’라고 생각한다. (P 221)
가장 인상적인 실험은 외과 수술에 의해 뇌량이 절단되어 뇌의 좌우반구가 서로 분리된 환자들을 대상으로 스페리가 행한 최근의 실험들일 것이다. 이 환자들의 오른쪽 눈과 오른쪽 손은 뇌의 왼쪽 반구에만 정보를 전달하며, 뇌의 왼쪽 반구도 오른쪽 눈과 오른쪽 손에만 정보를 전달한다. 그러므로 환자는 자신의 왼쪽 눈을 통해 보이고 왼쪽 손으로 만져진 대상을 알아보기는 하지만, 그 이름을 말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양손 중 어느 한쪽 손에 쥐어진 대상의 (3차원적) 형태를, 스크린에 비춰진 이 대상의 평면 전개도와 짝짓는 어려운 시험에서는 (말 못하는) 오른쪽 뇌가 (優性인) 왼쪽 뇌보다 월등히 더 뛰어나고 훨씬 더 빨리 식별해 낸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볼 때, 오른쪽 이야말로 주관적 시뮬레이션의 중요한 한 부분 - 아마도 가장 ‘심오한’ 부분 - 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다. (P 222)
- 자크 모노 (조현수 옮김). 철학. 우연과 필연. 궁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