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필연 (6)
<봉지털기 239-6>
반면 물리학은 우리에게 어떤 미시적인 존재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한계인 절대 온도0을 제외한 상태에서는) 양자적 차원의 요란搖亂을 겪지 않을 수 없음을 가르쳐준다. 이런 양자적 요란들이 거시적 시스템 내에 쌓이면, 이 시스템의 구조가 점차적으로, 결코 피할 수 없이,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이다.
생명체들 역시, 저 충실한 번역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의 기계장치의 보수적인 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세포 유기체의 노화와 죽음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번역과정에서 일어나는 우연적인 오류들의 축적에 의해 이뤄지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오류들은 특히 번역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데 책임이 있는 구성요소들에게 변화를 겪게 함으로써, 오류가 발생하는 빈도를 점점 더 높이게 되고, 그리하여 가차 없이 조금씩 유기체의 구조를 퇴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P 162)
다세포 유기체의 노화와 죽음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번역과정에서 일어나는 우연적인 오류*들의 축적에 의해 이뤄지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 이러한 우연적인 오류들은 바로 양자적 차원의 요란에 의해서 생기는 것. (P 162)
생물학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오늘날의 연구들 가운데 그 방법론적인 면에서 가장 뛰어나고 또한 그 중요성 면에서도 가장 심오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우리가 ‘분자유전학’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벤저, 야놉스키, 브레너, 크릭), 이들 연구 덕분에 DNA의 이중 사슬상의 폴리뉴클레오티드 배열이 겪을 수 있는 우연적인 불연속적 변화들의 여러 유형을 부분적으로나마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양한 돌연변이들이 다음과 같은 원인에서 기인함을 확인하게 되었다.
한 쌍의 뉴클레오티드가 다른 한 쌍에 의해 대체되는 경우,
한 쌍의 혹은 여러 쌍의 뉴클레오티드가 결손 되거나 부가되는 경우,
길이가 각기 다른 뉴클레오티드 배열 부분들이 서로 순서가 뒤바뀌거나, 반복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지거나, 서로 섞이는 등의 일로 인해서 유전암호의 텍스트가 다양한 방식으로 ‘뒤죽박죽’이 되어 변화하는 경우,
이러한 경우는 우발적인 것, 즉 우연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이러한 변화야말로 유전암호의 텍스트를 변경시킬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며, 또한 이 유전암호의 텍스트야말로 다음 세대에로 유전될 수 있는 유기체의 구조로 담고 있는 유일한 저장고이므로, 오직 우연이야말로 생명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새로움과 모든 창조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필연적으로 결론내릴 수 있다. 순전한 우연, 오직 우연, 절대적이지만 또한 맹목적인 것에 불과한 이 자유, 이것이 진화라는 경이적인 건축물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인 것이다. (P 164)
생명체라는 이 극히 보수적인 시스템에 진화의 길을 열어주는 기본적인 사건들은 미시적이며 우연적인 것들이며, 또한 이 사건들은 자신들이 생명체의 합목적적인 기능에 결국 일으키게 되는 효과들에는 전혀 무관심하다.
하지만 일단 DNA 구조에 새겨지고 난 다음에는, 이(특이하고 그 자체로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우연적인 사건들은 기계적으로 충실하게 복제되고 번역될 것이다. 즉 증식되고 전파되어 수백만 수천만의 동일한 복제가 생겨나게 될 것이다. 순전한 우연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필연의 세계로, 가차 없는 확실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선택이 작용하는 것은 거시적인 차원, 즉 유기체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P 171)
자연선택은 실로 우연의 산물들에 대해서 작용하지, 다른 데서는 자신의 먹이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자연선택이 작용하는 영역은 엄격한 요구가 지배하는 영역이며 모든 우연이 배제된 영역이다. 진화가 일반적으로 상향적인 방향성을 띠며 이뤄지는 것이나 점차적으로 더 화려하게 만개해가는 듯한 이미지를 주며 이뤄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엄격한 요구에 의한 것이지 우연에 의한 것은 아니다.
다윈 이후의 일부 진화론자들은 자연선택에 대해 논하면서 내용이 매우 빈약하고 소박하며 잔인한 관념을 세상에 퍼뜨리는 경향이 있어왔다. 단순한 ‘생존경쟁’이라는 관념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사실 다윈 자신이 사용한 표현도 아닌 스펜서가 사용한 표현일 뿐이다. 반면 20세기 초의 신다윈주의자들은 자연선택에 대해 훨씬 내용이 풍부한 생각을 제시해왔으며, 정량적인 이론에 입각하여 자연선택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생존경쟁’이 아니라 종 내부 안에서의 증식률 차이라는 점을 제시하였다. (P 172)
- 자크 모노 (조현수 옮김). 철학. 우연과 필연. 궁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