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지털기2

우연과 필연 (4)

이문형 2012. 7. 7. 01:11

<봉지털기 239-4>

d) 억제 단백질은 β-갈락토시드 역시 식별해낸다. 하지만 언제 단백질이 β-갈락토시드와 결합하기 위해서는 오퍼레이터 부위로부터 풀려나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β-갈락토시드가 있게 되면, 억제 유전자와 오퍼레이터 사이의 복합제는 해제되고, 따라서 메신저의 합성이 이뤄지게 되어 단백질의 합성 또한 이뤄지게 된다.

억제 단백질의 이 두 가지 상호작용이 비공유적이며 가역적이라는 점과 특히 유도물질(β-갈락토시드)은 이 억제 단백질과 결합하더라도 어떤 변화도 겪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자, 그러므로 이 계의 논리는 지극히 단순하다. 억제 단백질은 전사(轉寫)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억제 단백질의 이러한 작용은 다시 유도물질에 의해 억제된다. 이 ‘이중의 부정’으로부터 어떤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게 된다. 이 ‘부정의 부정’의 논리가 변증법적이지 않음에 주목하라. 이 ‘부정의 부정’은 어떤 새로운 명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본래부터 있던 명제, 즉 DNA의 구조 속 유전암호에 따라 이미 쓰여져 있던 명제를 단순히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생물학적 조절 시스템의 논리는 헤겔의 논리가 아니라 불(Boole) 대수의 논리를, 전자계산기의 논리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박테리아들에게서) 대단히 많은 수의 이와 유사한 시스템을 알고 있다. (p 113)

 

생명체는 그 거시적인 구조나 기능에 있어서는 기계와 아주 닮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하지만 생명체와 기계는 각자 만들어지는 방식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 기계의, 즉 어떤 인공물의 거시적인 구조는 외부의 힘의 작용에 의해서, 즉 재료에다 형상을 덮어씌우는 외적 도구의 힘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대리석으로부터 아프로디테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조각가의 끌이지만, 이 여신 자신은 (우라노스의 피투성이가 된 생식기에 의해 수태된) 바다 파도의 포말로부터 내어났다. 이 포말로부터 여신의 몸은 자기 스스로의 힘만으로 개화한 것이다. (P 121)

 

어떤 구조가 후성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은 창조가 아니라 드러남이다. (* 아이들이 좋아하는 ‘레고 맞추기’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물론 레고들을 서로 맞추어야지만 비로소 어떤 전체구조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 전체구조의 형성에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서로 맞추어지는 각각의 레고의 구조다.) (P 129)

 

생명체의 모든 합목적적인 구조와 작용이 이뤄지도록 하는 궁극적인 근거는 폴리펩티드 섬유의 아미노산 잔기들의 배열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아미노산 잔기들의 배열이야말로 맥스웰의 생물학적 도깨비 - 즉 구상 단백질 - 를 낳는 ‘맹아’인 것이다. 생명의 비밀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 그리고 이 의미는 아주 실제적인 것이다. - 바로 이 수준의 화학적 조직 속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단지 이 배열 순서를 기술하는 것을 넘어서 그 결합의 법칙을 밝혀낼 수 있다면, 그것은 생명의 비밀을 관통하는 일이자 궁극적인 근거를 발견하는 일이 될 것이다.

어떤 하나의 구상 단백질의 배열순서가 처음으로 완전하게 기술된 것은 1952년 상제에 의해서였다. 이 일은 비밀의 열림이면서 동시에 환멸이기도 했다. 이 단백질은 인슐린이었는데, 이 단백질의 구조를 관장하는, 따라서 어떤 기능을 발휘하도록 이 단백질의 선별적 속성을 관장하는 그의 배열순서 속에는 어떤 규칙성도, 어떤 독특한 특징도, 어떤 제한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이러한 자료들이 점점 축적되어 가면 언젠가는 몇몇 일반적인 결합의 법칙이라든가 기능적 상관관계가 드러날 것이라고 한동안 계속 기대하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유기체들로부터 뽑아낸 각양각색의 단백질 등의 배열 순서를 수백 종류 알고 있다. 분석과 통계의 현대적 기법을 이용하여 이들을 체계적으로 비교해 본 결과, 일반적인 법칙을 도출해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우연의 법칙이었다. (P 141)

 

하지만 이와 같은 의미에서 설령 단백질의 1차 구조 일체가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즉 폴리펩티드상의 매 연결고리가 가능한 20종의 아미노산 잔기 가운데 하나를 우연히 선택하여 이뤄진 것이라 할지라도, 역시 중요한 또 다른 의미에서는 지금 현재에 우리가 실제로 볼 수 있는 배열순서는 우연에 의해서 합성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배열순서가 특정한 단백질 분자들 속에서 실질적으로 거의 아무런 실수 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복이 없었다면, 일군의 단백질 분자 중 아미노산 배열순서를 화학적 분석을 통해 정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연에 의해 정해진 아미노산들의 배열순서는 각각의 유기체에서 혹은 각각의 세포에서, 아주 오랫동안 매 세대를 거쳐 실제로 수천 번씩 혹은 수백만 번식, 구조의 불변성을 아주 정확하게 보장해주는 메커니즘에 의해 반복되어온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P 143)

 

 - 자크 모노 (조현수 옮김). 철학. 우연과 필연. 궁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