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2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 안도현
이문형
2012. 6. 7. 11:22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 안도현
당신의 그늘을 표절하려고 나는 밤을 새웠다
저녁 하늘에 초생달이 낫을 걸어놓고 모가지를 내놓으라 하면 서쪽으로 모가지를 내밀었고, 달빛의 헛구역질을 받아먹으라고 하면 정하게 두 손으로 받아먹었다
오직 흔들리는 힘으로 살아가는 노란 꽃의 문장을 쓰다가 가늘게 서서 말라가도 좋다고 생각한 것은 바구지꽃이 피는 유월이었다
내 사랑은 짝새의 눈알만큼만 반짝이는 것이었으나, 그러나 내 사랑은 또한 짝새가 날아가는 공중의 높이만큼 날개 아래 파닥거리는, 사무치게 떨리는 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저 재바른 차를 폐차시키겠다, 귀가 순하고 소심한 노구의 당나귀나 한 마리 사서 한평생 당신을 싣고 다니는 게으른 노역이 주어진다면 쾌히 감당하겠다
눈썹이 하얗게 센 뒤에 펜을 잡고 한 줄을 쓰고, 열두 밤을 지나 그 다음 문장으로 건너간다고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