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지털기2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5)

이문형 2012. 5. 7. 00:19

<봉지털기 238-5>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교황보다 더 독실하다.’는 표현이 자주 쓰인다. 주변부 국가가 종교적, 경제적, 사회적 원칙을 적용하면서 그 사상이 나온 본고장보다 원칙을 더 엄격하게 지키려 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교황보다 더 독실하기로 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민족이다. (글자 그대로 온 국민이 가톨릭 교인이라서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가톨릭 신자는 국민의 10%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은 사실 작은 나라가 아니다. 1945년 국토가 양분되기 전까지 천 년 넘게 한 나라로 살아온 남북한 인구를 합치면 7천만 가까이 된다. 그러나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 강대국의 이해가 충돌하는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서 주변 강대국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고 본고장보다 더 철저하게 적용하는 데 능숙해졌다. 공산주의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북한은 러시아보다 더 철저한 공산주의를 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일본식 정부 주도 자본주의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남한은 일본보다 더 철저히 정부 주도 자본주의를 실시했다. 미국식 자본주의로 스타일을 바꾸겠다고 마음먹은 후에는 미국인들에게 자유 무역의 장점을 설교하면서 금융 시장과 노동 시장을 사방팔방으로 완전히 개방하여 미국인들을 무색하게 했다.

그러니 중국의 영향권에 있던 19세기까지 한국이 중국보다 더 유교적이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P 278)

 

인종 차별로 악명이 높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일본인들을 ‘명예 백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남아프리카 안에 있는 도요타나 닛산 공장을 운영하는 일본인 경영진들더러 인종 분리법에 따라 유색 인종이니 소웨토의 흑인 거주 지역에 가서 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백인 우월주의에 젖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지만 하는 수 없이 자존심을 접고 일본인들은 백인인 것처럼 받아들였다. 일제 자동차를 타려면 다른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시장의 힘이다. (P 281)

 

지나치게 결과를 균등하게 하려는 것은 해롭지만, 이 ‘지나치다’는 것의 한계를 어디로 정해야 하는지는 논의를 거쳐야 한다.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최소한의 소득, 교육, 의료 혜택 등을 보장함으로써 최소한의 역량을 갖출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지 않으면 공정한 경쟁을 한다고 말할 수 없다. 100미터 달리기 시합에서 모두 똑같은 지점에서 출발한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모래주머니를 차고 달려야 한다면 공정한 경기하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회의 균등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진정으로 공정하고 효율적인 사회를 건설하기를 바란다면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P 288)

 

차를 빨리 몰 수 있는 것은 브레이크가 있기 때문이다. 브레이크가 없다면 아무리 능숙한 운전자라도 심각한 사고를 낼까 두려워 시속 40~50킬로 이상 속도를 내지 못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실업이 자기 인생을 망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것을 훨씬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큰 정부가 사람들을 변화에 더 개방적으로 만들고, 그에 따라 경제도 더 역동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P 300)

 

시장은 무수한 경제 주체들이 수행하는 여러 가지 복잡한 경제 행위들을 상호 조정하는 데에 특히 효율적인 메커니즘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는 시장이 메커니즘 혹은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시장은 다른 기계와 마찬가지로 세심한 규제와 조정을 필요로 한다.같은 자동차라도 취객이 운전하면 살인 무기가 되지만 응급 환자를 신속하게 병원으로 이송하면 사람의 목숨을 구하듯이, 시장은 엄청나게 좋은 일을 할 수도 있고 안 좋은 일을 할 수도 있다. 또 성능이 개선된 브레이크를 장착하거나 더 효율적인 연료를 사용함으로써 자동차의 품질을 개선할 수 있듯이 시장도 참여자들의 태도와 동기 그리고 시장을 지배하는 규정을 적절하게 변화시킴으로써 더 잘 돌아갈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를 운용하는 데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중략…

모두에게 맞는 하나의 경제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스칸디나비아식 자본주의와 크게 다르고, 스칸디나비아식 자본주의는 독일식 혹은 프랑스식 자본주의와 다르다. 일본식 자본주의는 말할 것도 없다. …중략…

따라서 자본주의를 하되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 자유 시장주의라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에 대한 맹목적 사랑에서 눈을 떠, 더 잘 규제된 다른 종류의 자본주의를 해야 한다. 물론 이 다른 종류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목표, 가치, 믿음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P 330)

 

인간은 자유 시장 경제학 교과서가 주장하는 만큼 물질적 자기 이익만을 따라 움직이는 존재는 아니다. 만약 자유 시장 경제학 교과서의 주장대로 정말 이 세상이 합리적으로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들로 넘쳐 났다면 이 세상은 끊임없는 사기, 감시, 처벌, 협상 때문에 망했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개인과 기업이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미화함으로써 물질적 부만 쌓을 수 있다면 사회적 책임을 무시해도 되는 세상을 만들었다. 그런 과정에서 은행가와 펀드 매니저들이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직간접적으로 일자리를 파괴하고, 공장 문을 닫고, 자연환경을 해치며, 금융 시스템 그 자체까지 망치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런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는 물질적 부를 중요시하되 유일한 목표가 되지 않는 경제 시스템을 건설해야 한다. 또 기업이든 정부 부처이든 모든 조직은 구성원들 간의 신뢰, 상호 연대, 정직성, 협동 등을 장려하는 형태로 설계되어야 한다. 그리고 금융 시스템 개혁을 통해 기업에서 단기 주주의 영향력을 줄이고, 그렇게 해서 기업들이 단기 이윤 극대화 이외의 목표도 추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에 더해 우리는 공익을 위한 행동들(예를 들어 에너지 소비 절감이라든가 노동자 훈련에 대한 투자)에 정부 보조금뿐 아니라 보다 높은 사회적 중요도를 부여하여 더 많이 보상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도덕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자기 이익에 대해 좀 더 진보한 생각을 갖도록 호소하는 것이기도 하다. 단기적인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전체 시스템을 파괴하게 될 것이고, 이는 장기적으로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 (P 332)

 

 - 장하준 지음(김희정 · 안세민 옮김). 경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부·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