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아, 미안하다
생각해보면, 이 야생식물들은 곳곳에 퍼져 번식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지금 이것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잔디가 그 사이에 끼여 죽어버릴 것이다. 예수는 신약에서 밀알과 가라지를 골라, 가라지는 불에 태워야 한다고 했다.
성경을 내 행위의 근거로 삼든 말든 간에, 지금 내가 직면한, 인류가 늘 마주하게 마련인 구체적인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은 과연 자연에 얼마나 깊이 관여할 수 있을까? 그런 간섭은 언제나 부정적인 걸까, 아니면 때로 긍정적이기도 한 걸까?
나는 (제초기라는 이름의) 무기를 곁에 내려놓는다. 내 동작 하나하나에, 한 생명의 종말, 즉 내버려두면 내년 봄에 꽃을 피울 야생화의 죽음이 걸려 있다. 그것은 주위 환경을 멋대로 주무르려는 인간의 오만이기도 하다.
이건 좀더 생각해볼 문제다. 이 순간, 내가 다루고 있는 것은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닌가. …(중략)… 고민하는 내 머릿속에 『바가바드기타』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결전을 앞둔 아르주나는 사기가 꺾여 무기를 바닥에 내던지며 크리슈나에게 대들었다. 그는 형제를 죽여야 하는 전투에 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항변했다. 그러자 크리슈나가 대답했다. “네가 정말로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너의 손은 나의 손이라. 네가 하는 모든 것이 이미 기록되어 있다. 죽이는 자도 죽는 자도 없느니.”
갑작스레 떠오른 이 대목에서 나는 용기를 얻어 다시 ‘창’을 집어 들고, 정원에 자라난 불청객들을 향해 돌진했다.
오늘 아침, 한 가지 깨달음이 내게 남았다. 내 영혼 안에 원치 않는 무언가가 자라나면 나는 신께 간구할 것이다. 아무 연민 없이 그것을 제거할 용기를 내게 허락해달라고. (P 24)
- 파울로 코엘료 (박경희 옮김). 산문. 흐르는 강물처럼. 문학동네
솔직히 파울로 코엘료의 이 글을 읽으며 위안을 삼는다.
시골에 들어가서 농막(조립식)을 짓고 밭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하며 봉착하는 문제가 바로 풀과의 인연이다.
풀들도 하나하나 저마다의 생명력을 갖고 살아가고 있을 뿐인데,
환경이 바뀌어 내 삶에 반한다고 하여 함부로 치워버리고자 하니,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풀들이 많으면 벌레가 많다. 가장 흔한 것이 모기다.
윗밭에는 과수원과 밭작물과 양봉을 한다. 그래서 벌들이 수시로 놀러온다. 한 번은 벌에게 쏘인 적도 있다. 벌침을 맞았다 생각하고 일 년을 보냈지만 그리 반가운 것은 아니다.
벌레가 많으니 새들도 많고, 거미도, 개구리도, 아, 그리고 뱀도 다닌다.
풀은 생명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어느 것보다 가장 왕성한 생명력으로 지탱해 주기 때문에 고맙기도 하지만, 도시에서 살아온 나 같은 초짜에게는 그런 것만도 아니다.
매년 풀과의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애잔하다.
제초기나 제초제(제초제는 가능한 절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농막 주변의 잡초 제거로만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니 어쩔 수 없다. 한 번 경험해 보시라.)로 풀을 제거하면 숨어있던 다른 풀씨들이 돋는다.
잘린 어떤 풀들은 위로 자라지 않고 밑으로 기며 더 많은 가지를 참 길게도 뻗는다.
장마철을 전후해서는 풀을 자르고 뒤돌아보면 한뼘식 더 자라 있는 게 풀이다. 뿌리를 아예 뽑으라고 하는데 글쎄, 돌아서면 또 다른 씨앗이 발아하니 지치기도 하지만 아주 적은 자리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않고 생명을 피워내는 것들인데라는 생각이 자꾸 드니 기구한 인연인 것은 분명하다.
파울로 코엘료의 말을 인용하며 매일 용기를 낸다.
" 내 영혼 안에 원치 않는 무언가가 자라나면 나는 신께 간구할 것이다. 아무 연민 없이 그것을 제거할 용기를 내게 허락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