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바람 그리기

장승 / 이문형

이문형 2008. 9. 30. 01:00

          장승  /  이문형

 


해질 녘, 외길에서 만난 벅수가

눈을 부라리며 길을 막는다


나를 지탱한 모든 무기를 거두고

나의 찌든 삶에서

고유함을 보이라고 한다

바람도 일월日月도 빼고

추스를 수 없는

깊숙한 인간의 슬픔을 보이라고 한다

망각 속으로 밀어 넣은

가장 미천微賤한 것을 보이라고 한다

마음 속 가난이라도 꺼내라고 한다

어긋난 꿈을

고독의 깊이를 보이라고 한다

어디서부터 비롯된

나의 뿌리인지 꺼내보라고 한다

자신을 버릴 때만이 모두가 살 수 있는

그런 사랑을 보이라고 한다


혼이 나가

내 속을 훌렁 뒤집어 보일 때

껄껄 웃는 장승


   「바람 그리기」시편 : 책나무출판사